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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열왕기상

왕상 17장 8-9절(주님이 가라 하시는 곳으로)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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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장 8-9

주님이 가라 하시는 곳으로

안효관 목사 2017-04-0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며칠 전인 3월 30일 미국의 유명한 매체인 뉴욕타임스(NYT)의 보도에 따르면 서방 기자들이 가장 꺼려하는 보직은 중국의 베이징과 인도의 뉴델리 특파원이라고 합니다. 자국(自國)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생활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특별히 중국의 베이징과 인도의 뉴델리에 특파원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공해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30일자에 현재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디디 커스틴 타트로우가 쓴 ‘외국 특파원들이 숨 쉬며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자에 따르면 자신은 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디를 가든지 가장 먼저 휴대폰을 꺼내 공기의 오염도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공기오염도를 측정해 주는 앱을 다운받아 오염도를 측정하는데, 공기오염도가 300이상이면 위험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겨울에는 300이 넘는 날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밖에 나갈 때에는 항상 황사마스크를 쓴다고 합니다.<사진1> 그럴 때면 늘 엄마를 잘못 만나 아이들이 이렇게 공기가 좋지 않은 베이징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베이징의 황사나 공해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국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일어나는 재해 가운데 하나가 공해와 황사입니다. 중국은 현재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이 값이 싼 석탄입니다 우리도 옛날 어려울 때에 석탄을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석탄을 태울 때 일어나는 공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전력 60%이상이 석탄을 태워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공장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으로 인해 중국의 대기오염이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거기에다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사막화가 가속되면서 거기에서 시작된 황사 또한 심각합니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도의 뉴델리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뉴델리 특파원으로 간 한 기자의 진술에 의하면, 뉴델리에 도착해서 비행기의 문이 열리는 순간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강한 화학물질이 타는 냄새가 기내로 밀려들어왔고, 뉴델리에 사는 동안 1년 내내 그런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베이징이나 뉴델리에 특파원으로 생활하는 동안 집안의 방마다 공기청정기를 설치해보지만 공기오염으로 인한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공기 오염은 비단 중국이나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을 괴롭게 만들고, 세계는 점점 대기오염의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공기오염이나 대기오염으로 인해 매년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공기오염과 공해가 심각한데도 서방의 기자들이 베이징에 가야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회사에서 그곳으로 파견을 했기 때문입니다. 특파원들의 자조 섞인 하소연처럼, 월급쟁이들은 근무여건이 좋은 지역을 자기들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가라고 하면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대로 가야 합니다. 아니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그 길이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갔습니다. 때로는 그 길이 자신이 가고 싶지 않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셨기에 갔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큰 흉년이 있었습니다. 그 흉년은 아합 왕과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내려진 징벌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열왕기상 16:30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아합 왕은 그 이전의 모든 왕들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 많이 행했던 사람입니다. 악한 왕이냐 선한 왕이냐를 평가하는 기준처럼 여겨졌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는 가볍게 여길 정도로 악을 행했습니다. 아합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왕비인 이세벨은 자기 수하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두고서 전국에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도록 부추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로 인해서 우상을 섬기는 일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이나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그 땅에는 기근으로 인해서 큰 흉년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열왕기상 17:1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아합 왕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전까지 수년 동안 비도 내리지 않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기를 떠나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도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오랫 기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 것이고, 그래서 백성들이 흉년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다는 것 때문에 아합 왕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는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뭄을 예언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갖게 했으니, 오늘날로 말하면 민심을 교란시키는 유언비어 유포자요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내가로 피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가서 몸을 숨깁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고향인 길르앗을 떠나 그릿 시냇가로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르앗은 요단 동쪽 아르논 강에서 야르묵 강까지 이르는 넓은 평야를 말하는데, 그곳은 곡창지대와 목축지로 유명할 정도로 곡식이 풍부하게 생산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길르앗이 얼마나 살기 좋은 땅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그 길르앗을 통과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가 모세에게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 길르앗 땅에서 살고 싶으니 이곳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 세 지파는 가나안 땅이 아닌 요단 동편인 길르앗 지역에 머물러 살게 됩니다. 그 정도로 길르앗 지역은 먹을 것이 풍부한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떠나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흉년이 들 때에는 곡창지대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곡창지대에 있어야 조금이마나 먹을 것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가서 몸을 감추라고 하십니다. 더구나 까마귀를 통해서 매일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너무나도 다른 명령이었습니다. 비록 아합 왕에게 미움을 받아 현상수배범이 되었다 하더라도 곡창지대인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더 낫다는 것을 엘리야도 잘 압니다. 더군다나 이런 흉년에 사람도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때에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시겠다고 하니 정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어느 것 하나 이치에 맞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릿 시냇가로 갑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얼마나 지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뭄으로 인해 그릿 시내의 물로 말라버리자 이번에는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돈은 이스라엘 땅 북쪽에 위치한 이방 땅입니다. 더군다나 그 시돈은 왕비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미움을 받아 현상수배범이 된 엘리야가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 땅으로 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시돈 땅으로 갑니다. 더군다나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기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다른 아닌 과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돈 많은 부잣집이거나 권세 있는 명문가의 집으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집입니다. 간혹 과부 가운데는 죽은 남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일 뿐입니다. 성경 시대에 대부분의 과부들은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레위기나 신명기 등 율법에 보면 과부는 고아나 나그네 등과 함께 사회적인 약자로 언급되면서,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농사를 지은 후 추수할 때에도 밭모퉁이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 놓아야 하고, 추수하다가 남겨진 이삭은 그들이 주어가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남이 농사지은 것 중에서 지극히 적은 한 부분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과부입니다. 그런 과부에 그 흉년에 먹을 것이 넉넉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과부에게 가면 그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돈 땅 사르밧의 과부에게로 갑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거기로 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왕비 이세벨의 고향인데다 이방 땅입니다. 더구나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정황이 이치에 맞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니 엘리야는 두 말 하지 않고 가라 하신 곳으로 갑니다.

 

여러분, 그것이 믿음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결코 합당하지 않는 명령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기에 가라 하신 곳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곡창지대인 길르앗을 떠나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하셨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 흉년에 그 떡과 고기를 어디에서 물어왔는지는 몰라도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먹을 것을 꼬박꼬박 공급해 주셨습니다.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로 갔을 때에도 먹을 것이 없어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는 죽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그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기적 같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갔을 때 그런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엘리야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이해되어야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을지라도,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기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가기 싫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하고, 그런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며 죽으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임을 아시고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가시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는 그 길을 가셨습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만 우리를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가라 하실 때도 있고, 때로는 가기 싫은 곳으로 가라 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힘들더라도, 조금은 낯설더라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이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면 그 길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여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기적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여러분, 개를 데리고 산책하실 때 절대로 개와 함께 달리기를 하면 안 된답니다. 왜냐하면 개보다 늦게 달리면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고, 개하고 같이 달리면 개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개보다 빨리 달리면 개보다 더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보다 조금 앞서 달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되고, 주님과 같이 달리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주님보다 조금 뒤쳐져 달리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삶에서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가고 싶은 길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진 않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을 지라도 주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면 우리는 그것을 포기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 하라 말씀하시면 힘들지라도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이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의 생각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종에는 하나님께서 기적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올 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소속이었던 언더우드 목사님은 본래 인도 선교의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친구 가운데 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국에 갈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마음속에 ‘왜 네가 가지 않느냐?’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는 자신이 한국에 가기 위해서 북장로교 선교부에 자신이 한국에 가길 원한다는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선교비가 없어서 선교사를 보낼 수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한 개혁교회에서 자신을 담임목사로 청빙한다는 청빙서가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가는 길도 막히고 인도로 가겠다는 꿈도 잘 이뤄지지 않자, 자신을 청빙하겠다는 그 교회에 담임목사 청빙에 응하겠다는 수락의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갖다 넣으려 했습니다. 그 때 또다시 그의 마음속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결국 그는 편지를 부칠 수가 없었고, 선교부에 가서 한국에 가는 문제를 의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선교부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선교부 총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참 잘 왔소. 당신께 편지할 때는 선교비가 없었지만, 며칠 전 어떤 사업을 하는 사람이 한국 선교비로 6,000불을 가지고 왔으니 우선 이것으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좀 가시지요.” 그렇게 해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부활주일 아침에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서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비록 그 길이 좁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히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선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길을 갈 때에는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말씀하신 곳으로 갔습니다.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어처구니없는 말씀 같았지만 말씀대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이해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곳에서는 이해의 자리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은 은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할까 하고 말입니다. 내가 선택하여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오늘 내가 선택하여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결단하고 가십시다. 그 길에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동행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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