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15장 1-4
분노를 쉬게 하라!
안효관 목사 2020-08-16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걸리버 여행기』라는 책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는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글은 유머와 풍자, 그리고 당시 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724년에 쓴 『드래피어의 편지』(Drapier's Letters)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영국의 열악한 통화정책에 의한 아일랜드의 착취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에 동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런던의 한 상인에게 아일랜드에 동전을 공급하는 ‘동전주조권’을 맡깁니다. 그런데 그 동전이 구리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값어치가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일랜드 사람들의 불만과 원성이 대단했습니다. 이를 보고 스위프트는 영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글을 써서 신문사에 세 번이나 투고했습니다. 자신의 본명으로 투고하면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드래피어’(Drapier)라는 가명으로 말입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그렇지 않아도 아일랜드 국민들의 원성도 감당하기 힘든 판에 신문에 세 번이나 영국을 비난하는 글이 게재되자, 그 글을 쓴 드래피어를 붙잡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이 가명이기 때문에 쉽게 그를 찾아낼 수 없었고, 결국 300만 파운드의 현상금까지 걸고 드래피어라는 가명으로 신문에 투고한 사람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드래피어라는 가명으로 글을 투고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글을 깨끗하게 옮겨 적어준 그의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집사가 어느 날 귀한 도자기를 깨뜨리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 도자기는 자기 집안의 가보처럼 여겨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그 집사를 심하게 꾸짖고는 집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집사를 쫓아낸 후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쫓겨난 그 집사가 복수하기 위해서 ‘스위프트가 드래피어라는 가명으로 신문에 투고한 사람’이라고 영국 정부에 신고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몇날며칠을 긴장과 걱정 속에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영국 경찰이 그의 집으로 오지 않았고, 결국 시간이 흘러 현상수배기간이 끝났습니다.
그 후 스위프트는 그 집사를 찾아내서 자신의 집보다 더 좋은 집에서 집사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을 고발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주인님을 고발하면 엄청난 보상금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주인님에게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순간 제 감정 때문에 주인님을 신고한다면 주인님은 더 이상 작품을 쓸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먼 훗날 주인님의 위대한 작품은 탄생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단지 그것이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그 후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 등 영미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글들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위프트는 한 순간의 분노 때문에 인생에 큰 위기를 맞을 뻔했습니다. 만일 그의 집사가 그의 재주를 인정해주는 넓은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그는 영국 정부에 의해서 체포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위대한 작품은 탄생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분노! 우리의 삶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의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삶이 위축되고 불확실성이 강한 시대에는 더욱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내면에서 강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집단분노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들 가운데 하나인 분노가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집합적으로 생산되고 동원되고 증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분노가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집단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 언제 그칠지 모르는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삶이 제한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기록적인 지루한 장마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서 그 분노가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폭발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묻지마 폭행이 그런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총기난동 사건이 그런 분노의 시대를 잘 대변해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분노는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어떤 일을 강요당했을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정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뭔가를 하고 싶은 데 하지 못하게 방해를 받거나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요당할 때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화가 분노라는 것입니다. 평론가 정지우 씨가 쓴 『분노사회』라는 책에서는 ‘자신에게 나름대로의 논리와 관념의 흐름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것을 부정하거나 도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할 때 우리 속에서 분노의 감정이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불합리하다고 여겨진 상황, 또는 자기 자신이 부정되고 거부당한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분노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합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일한 상황을 겪는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분노가 되고 어떤 사람은 그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에 더 큰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요즘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의 일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이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모임이 줄어들고 여행을 꺼리면서 다른 사람과는 비대면(언택트)의 상황이 많아진 반면,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 등으로 가족들끼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굉장한 불편을 초래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며 살아야 하는 가족들끼리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반면 어떤 사람들은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들끼리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딥 콘택트(deep contact)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딥택트(deep-tact)라고 부릅니다. 가족끼리 얼굴을 대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떤 사람들은 서로 불편을 느끼며 마음에 분노가 쌓여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 서로를 이해하고 더 깊이 알아가는 행복의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문제는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아닙니다.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풀어 가면 같은 상황일지라도 행복과 삶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반면,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대하면 그 상황이 우리에게는 불쾌감을 주고 우리 내면에 화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라는 단어와 ‘노’라는 단어입니다. ‘분노’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결코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극렬하게 솟구쳐 오르는 극단적인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반면 ‘노’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콧구멍을 뜻합니다. 화를 낼 때 콧구멍이 커지는 동작을 표현한 것입니다. 분노보다는 조금 더 일반적인 감정상태인 노여움이나 성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1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뜻은 우리가 남을 불쾌하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을 노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노여움의 감정이 더 커지면 분노를 만들어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적 회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분노에 빠지진 않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생기거나 불쾌한 일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그 기분 나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게 내 마음속에서 부풀고 부풀어서 나중에는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렇게 자라버린 분노는 쉽게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화(노)가 만들어질 때 그것을 빨리 다스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큰 감정이 나를 휘몰아치지 않습니다. 요즘 계속된 장마와 폭우로 여러 곳에서 제방의 둑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피해를 낳았습니다. 제방이 무너질 때도 그렇습니다. 거센 물살이 밀어붙일 때 곧바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딥니다. 힘을 다해 견딥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한순간에 제방이 터져버립니다. 그러면 엄청난 피해와 아픔을 낳습니다. 분노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부터 가인이 아벨을 죽일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작은 분노가 가인의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가인을 직접 찾아가셔서 ‘왜 안색이 변해 있느냐?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가인의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가 크지 않았습니다. 얼굴색이 조금 변할 정도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미리 그 분노가 커지지 않도록 가인에게 분노를 잘 다스려 죄를 짓는 데까지 나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 안에 일어난 그 작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동생을 쳐 죽이는 끔직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을 때 다스려야 합니다. 내 감정에 작은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끔찍한 죄악입니다. 가인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 생각과 너무나도 다른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면 분노의 감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의 욕구가 저지당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강요당했을 때 분노의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발할 때에는 죄를 짓게 됩니다. 분노가 폭발한 곳에는 죄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마음에 찾아든 그 분노의 감정을 너무 빨리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내 마음에 일어난 분노의 감정을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드러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16:32절에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19:11절에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가르쳐줍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곧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는 실패한 왕이 되고 맙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위대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원자폭탄과 같은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우리 마음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거든 그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빨리 풀어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불의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고 매매하여 더러운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런데 당신 자신을 향해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분노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기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과 반대되는 태도를 취합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항거하거나 분을 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반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거나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생각될 때에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바뀌어져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저항해야 합니다. 반면 내가 손해보고 내가 싫은 소리를 듣고 내가 바보 취급을 당할 때에는 참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의 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화를 내고 분을 내는 이유는 우리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있는 그 상처를 건드릴 때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분을 냅니다.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 안에 상처가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치료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상처가 치료되고 자존감에 높아지면 화를 내는 상황이 훨씬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상처가 많은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런 내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작은 분노가 일어날 때 큰 분노로 확장시키지 않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화나게 하는 현장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의 현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에 작은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자꾸만 그것을 되새김질을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분노가 더욱 커집니다. 그것을 빨리 잊어야 합니다. 분노의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은혜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분노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줍니다. 분노로 인해 우리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분노한 상황에 대해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양을 힘껏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분노는 자라지 못합니다. 분노가 커질 먹이가 사라졌기 때문에 분노가 커지지 못하고 점점 사라지고 맙니다.
분노를 쉬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분노하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 분노는 내 안에서 크고 자라서 나를 집어삼켜 나로 죄에 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분노가 내 안에서 쉬게 하십시다. 분노의 자리에서 떠나 찬양과 기도의 자리로 옮겨 믿음으로 분노를 이겨내십시다.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이고, 우리에게는 평강의 은혜를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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