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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잠언

잠 15장 1-4절(분노를 쉬게 하라! 2) - 안효관

by Preacher 2024.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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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5장 1-4

분노를 쉬게 하라!②

안효관 목사 2020-08-2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중국 춘추전국 시대 제나라의 제경공(齊京公)은 새 사냥하는 것을 아주 즐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촉추(燭鄒)라고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잡아온 새를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촉추가 방심한 틈을 타서 새들이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경공은 크게 화가 나서 자신의 새를 관리하지 못한 촉추를 당장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안자(晏子)가 그 제나라의 재상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제경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촉추에게 세 가지 죄목이 있으니, 제가 그 자의 죄상을 하나하나 지적한 다음에 죽이도록 하십시오.” 제경공은 지혜로운 안자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그렇게 하마’ 라고 약속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자는 촉추를 불러다놓고 제경공의 면전에서 촉추의 죄상을 하나하나 열거했습니다. “촉추! 너는 우리 임금님의 새를 관리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도리어 새들이 달아나게 했으니 이것이 네 죄의 하나이니라. 이 일로 우리 임금님이 새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했으니, 이것에 네 죄의 둘째이니라. 그리고 이 일로 각국의 제후들이 이런 소문을 듣고 우리 임금님이 새는 중시하면서 사람은 경시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네 죄의 셋째이니라.” 이렇게 안자가 촉추의 죄를 열거한 후에 제경공에게 ‘이제 그의 죄가 분명해졌으니 그를 죽이시라.’고 말하자, 제경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죽이지 마시오! 내가 그대의 가르침을 따르겠소.”

 

안자는 지혜로운 말로, 제경공이 자칫 화를 참지 못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에서 그의 실수를 막아 주었습니다. 물론 제경공의 새를 관리하는 관리인 촉추가 새를 잘 관리하지 못한 죄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새를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관리를 죽인다면 분명 제경공은 나라 안팎에서 큰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자는 제경공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제경공으로 하여금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말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안자는 공자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여러 나라가 혼란스럽게 세력다툼을 하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뛰어난 언변과 지혜로 난국을 헤쳐나간 명재상 중에 한 사람입니다. 비록 키가 작고 외모에 볼품이 없었으나 지혜와 재치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안자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을 때 큰 부자인 나발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부잣집에서 양털을 깎을 때에는 큰 잔치를 베풀어 이웃과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집에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던 터라, 그날 사람을 보내 자기 일행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좀 얻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을 아주 못된 놈이라고 말하면서 단호한 어조로 다윗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다윗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 400명을 이끌고 나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발의 집을 모조리 진멸하겠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하게 다윗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자기가 나발의 아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신이 먼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말로 다윗의 화를 진정시키고 자기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잔뜩 화가 나 있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이 분명한데, 당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실 때 무죄한 피를 흘렸다든지 친히 보복했다는 말을 들으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사무엘상 25:30-31)

 

이비가일은 다윗에게 지금 잠시 화가 난다는 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면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에 이 일이 왕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지혜로운 말을 해 준 아비가일을 칭찬하고서 나발의 집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접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아비가일의 지혜에 감탄했던 다윗은 나발이 죽고 난 후에 그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이 다윗의 화를 진정시켰고, 다윗으로 하여금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아비가일 자신은 후에 왕비가 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말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지혜로운 말 한마디의 위력을 대단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말씀을 나눈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분노하게 될 상황과 자주 맞닥뜨리곤 합니다. 불합리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없는 환경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쉬게 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너무 빨리 그 분노가 우리의 마음에서 폭발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진정되지 못하고 너무 쉽게 폭발하는 분노나, 내 안에서 부풀고 부풀어 커진 후에 폭발하는 분노는 핵폭탄과도 같이 우리의 삶을 모두 파괴하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분노를 쉬게 하는 데에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안에서 분노가 자라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머물도록 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가 자라는 이유는 그 분노가 자라도록 하는 먹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자라도록 하는 먹이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먹이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먹이입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본질적으로 내적 먹잇감이 늘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성입니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분노가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하면 그 분노가 우리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죄와 손을 잡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노가 죄와 손잡지 못하도록, 분노가 죄를 먹잇감 삼아 자라지 못하도록 죄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를 이기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가 죄를 먹잇감 삼아 자라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에는 죄가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분노의 먹잇감이 되는 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나의 분노를 부추기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이겨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커지면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분노를 이겨보려고 기도합니다. 그런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과격한 말’입니다. ‘과격한 말’은 단순히 험하고 거친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말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으로 한다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이나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 아프게 하는 말이 곧 과격한 말입니다. 그런 과격한 말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이 잠잠해지려 할 때에 그 분노를 다시금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드는 분노의 먹잇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도 그런 과격한 말이 ‘노를 격동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노’는 1절 앞부분에서 말하는 ‘분노’와는 다른 말입니다. ‘노’는 우리의 콧구멍을 벌렁거리게 만들 정도인 일반적인 화남의 상태입니다. 그런 분노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집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하면서 그런 화남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군가가 그 작은 화남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그 마음의 상처를 건드려 아프게 만들면 그것이 분노로 변합니다. 그 분노는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인 폭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 화남을 자극하거나 잔뜩 화가 나 있을 때 그의 상처를 건드려서 폭발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홀로 두면, 그리고 옆에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다려주면 그가 마음을 진정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텐데, 위로한답시고 그에게 오히려 화를 격동시키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노는 그것을 먹잇감 삼아 분노로 폭발하고 마는 것입니다.

 

반대로 유순한 대답은 폭발하려 하는 분노의 극한 감정을 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그렇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려 할 때에 그것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부드럽고 상냥한 말로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그런 것을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사실을 말해준다고 하면서 상처입고 아파하는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화가 난 사람에게 사실을 말해준다며 그 사람의 화를 더 돋우어 그 화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자라도록 하는 사람은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삶의 지혜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선하고 기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4절에서도 같은 뜻입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온순한 혀’라는 말은 치료하는 말을 하는 혀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고 고쳐주어 그가 기쁨과 행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 ‘패역한 혀’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들춰내고 상처를 건드려서 마음을 파괴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로 한다면 ‘오장을 뒤집어 놓는 말’입니다. 화를 더 돋우고, 상처를 쑤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결국 그 사람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항상 감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왜 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던 도중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살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분노를 잠재워 쉬게 하는 선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분노를 키워 그 분노를 폭발하게 하는 악한 사람으로 사는지를 늘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잘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말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오늘의 말씀에 적용시켜 보십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의 화를 돋우어 그의 화가 진노가 되어 폭발하게 한다면, 언젠가 우리도 그대로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처럼 누군가도 나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로 저주를 했다면 그대로 내게 저주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거꾸로 내가 유순한 대답과 온순한 혀로 누군가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어 치료해 준다면 내가 마음 아플 때,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해서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나를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어떻게 살았느냐, 평소에 어떤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이 결국에는 내게 그대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 중 한 양반은 평소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만득이는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주었습니다. 다른 양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서방, 고기 한 근 주게.” 만득이는 그 사람에게도 고기를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봐도 고기의 양이 달랐습니다.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뒤에 산 양반의 것이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서 고기를 샀던 양반이 화가 나서 따졌습니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은 게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어르신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내게 돌아오는 것도 달라집니다. 내가 공손하게,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한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하게 하거니와 내게도 유익으로 돌아옵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막 대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말을 하면 듣는 사람도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에게도 그대로 돌아옵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반찬을 더 달라고 할 때에도 친절하고 공손하게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 기쁘게 응대하지만, 마치 내가 돈을 냈으니까 내 권리를 주장한다는 듯이 함부로 말하면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쁠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결코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잠언 18:2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말은 가능하면 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29)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로마서 12:1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우리는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결코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누군가의 노를 격동시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저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나 화가 분노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축복하는 말, 칭찬하는 말, 긍정적인 말, 위로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 높여주는 말, 소망을 주는 말, 감사하는 말, 때에 적적한 말, 그런 말은 화가 난 마음까지도 누그러뜨립니다. 분노를 쉬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야고보서 3:6)고 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을 그렇게 망치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말 한 마디로 누군가의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좌절하고 낙심되고 죄에 빠진 사람을 건져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분노는 한 사람의 생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인격을 구해내는 것이고, 그의 영혼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유한 말을 하십시다. 누구나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을 하십시다.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말만 하십시다. 특별히 내 주변에 누군가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그의 분노가 잠잠해지도록 도와주십시다. 그것이 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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