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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잠언

잠 17장 1절(행복이 회복되는 가정) - 안효관

by Preacher 202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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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7장 1

행복이 회복되는 가정

안효관 목사 2015-01-11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지난 5일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48세의 한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가 왜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스런 두 딸을 살해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IT기업에서 일하면서 상무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해왔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 2012년 직장을 잃으면서 그의 인생은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직으로 수입이 끊기자 그는 아파트를 담보로 5억을 빌렸습니다. 그 돈으로 그는 자신이 실직하지 않는 것처럼 매달 아내에게 4백만 원의 생활비를 주면서 실직한 사실을 숨겼고, 매일 근처 고시원으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주식에 손을 댔지만, 2억이 넘는 돈을 날리게 되었고, 남은 돈은 1억 3천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털어놨습니다만, 그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강남의 아파트는 시가가 10억이 넘고 아내의 통장에는 3억이 넘는 현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살해 동기가 의문이 듭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자존심이 강한 반면 의지가 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가 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의 가정이 그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실직을 아내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남편의 성격이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아픔과 고민을 나눌 만큼 부부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실직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면 아내가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잔소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내가 정말로 그럴지 안 그럴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 아픔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래서 서로의 짐을 나눠질 만큼 좋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는 모든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합니다. 가정은 그런 곳입니다. 가정은 서로의 허물도 그대로 받아주는 곳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가정에서만은 서로 신뢰하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가정은 그래서 따뜻한 곳이어야 하고, 위로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지치고 힘들 때 그래도 가정에만 오면 힘을 얻을 수 있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가정들이 그렇지 못한 모습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강남의 세 모녀 살해 사건은 그런 우리 시대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보여주는 한 예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정의 모습은 모두가 행복해 하는 가정입니다. 그 행복은 그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행복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숨겨놓은 '행복이라는 보물'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 없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행복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곳에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제육’은 화목제사를 드릴 때 쓰는 좋은 고기로 만든 반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쓰인 제물은 언제나 최선의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흠 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가장 좋은 짐승을 제물로 잡아 바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고기로 만든 최고급 반찬을 놓고 식사하는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정에 행복을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육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조건들을 상징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이 조건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강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모릅니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결혼 조건에서도 돈을 얼마나 가졌는지를 따집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좋은 직장에 다니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도 결국은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 계속해서 돈을 벌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런 조건이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건강한 것이 좋고, 기왕이면 돈에 여유가 있어 풍족하게 살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의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돈이 많다 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우리에게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 행복을 잃는 때가 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한결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 건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도 어느 순간에 그 가진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으로 인한 행복은 그 상황이 바뀌면 행복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어도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의 가정에 행복을 만들어주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화목입니다. 마른 떡을 먹고 살아고 화목하면 그 가정에는 행복이 넘쳐납니다. '마른 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떡을 자주 만들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오래 보관해도 되게끔 마른 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화목하기만 하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화목’(쉐레바)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정, 평안함, 교요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통해서 행복을 만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화목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언제 우리의 가정에 화목이 깃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을 이루는 식구들의 마음이 평안한 때입니다.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할 때입니다. 가정이라고 해서 어찌 상황에 요동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48세의 한 가장처럼, 우리의 삶에 언제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모릅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부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외국계 기업에 들어가서 40대의 젊은 나이에 상무라는 임원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분명 출세한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11억이 넘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고, 통장에 3억이 넘는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평생 행복할 것만 같은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50세도 채 안된 나이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주식에 투자했을 때 돈을 벌기는커녕 2억이 넘는 돈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속에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평정심이 없었습니다. 변화에 대처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가정을 파괴하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후의 삶을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웠다면 그의 가정에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화된 상황에서 평정심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다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다툼이 우리의 가정에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산다 하더라도 다툼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전쟁은 무서운데 어른들은 왜 전쟁을 하나요? 왜 전쟁이 일어나나요?” 아들에게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아빠가 한 참을 생각하가다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얘야, 네가 알아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면, 1914년에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벨기에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단다.” 그러면서 설명을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가 “여보,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진실되게 바로 알려줘야죠. 그 전쟁은 처음에 누군가가 살해되어 복수하고 또 복수하다가 시작된 거죠.” 그러면서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이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아내는 ‘진실되게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당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쟁이 왜 시작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싸움이 시작됩니다. 정말 싸울 거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화를 내고 다투고 싸웁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대부분은 평정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평정심을 잃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감격입니다. 우리 안에 한결 같이 간직해야 할 구원의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평정심을 잃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언제나 변함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변합니다. 수시로 변합니다. 때로는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때로는 좋지 않는 방향으로 바뀝니다. 내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일들도 생기지만, 때로는 결코 반갑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큰 고통을 주는 일도 일어나고, 내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 평정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앗아갑니다. 우리의 가정에 일어나는 그런 변화들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평정심을 잃게 되면 우리의 가정에서 행복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영원히 동일하신 우리 주님을 모시고 살면, 삶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서도 우리는 중심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중심이 되시고 내 마음의 중심에 계시면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게 됩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구원의 감격, 하나님을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는 구원의 감격이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으면 우리는 삶에 일어난 수많은 변화에도 평정심을 갖게 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언행에 거짓되거나 헛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용서받는 감격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 삼아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늘 감격 속에 고백하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만일 내 가족, 내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비유로 가르쳐주셨습니다.(마태복음 18장)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인간이 그 어떤 노력으로도 값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의미합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는 노동자 20년치 연봉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일반 노동자의 20만년 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일반 노동자 1년 연봉이 3천만 원이라고 한다면 일만 달란트는 약 6조원입니다. 오늘날처럼 풍요를 누리는 시대라 하더라도 6조원의 빚을 진 사람이 그것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그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자 주인이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그 친구에게 당장 그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지금을 갚을 수 없으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는 친구의 간청에도 그는 그 친구를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그는 그 친구를 본 순간 자신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불러놓고서 ‘나는 너를 불쌍히 여겨 그 어마어마한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네 친구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한데도 왜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탕감해 준 그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시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받은 용서는 한량없이 큰데, 내게 적은 빚을 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은 그래서 용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와 같은 내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알기에, 내 형제 내 이웃의 허물을 용서합니다. 기꺼이 기쁨으로 용서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 바로 가족입니다. 가정에서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가정은 용서하는 장소입니다. 가족은 어떤 허물인든 덮어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가족 가운데서도 부부가 먼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부부가 사랑하며 살 때 아이들도 부모님의 모습 속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부부의 행복입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서 아이는 가장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 하면서 서로 다투기만 한다면 그 속에서 아이들은 좋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부모에게서 용서를 경험한 아이가 나중에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품은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는 내가 받은 것만큼 베풀 수 있습니다.

 

참 좋은 글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여섯 가지 원칙입니다.

 

첫 번째는 산울림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산에 가서 ‘야 바보야!’라고 외치면 산에서 ‘야 바보야!’라고 되돌아옵니다. 반대로 ‘야 너는 천재야!’ 라고 외치면 ‘야 너는 천재야!’라는 산울림이 들립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내가 먼저 남에게 그대로 해 주어야 합니다. 아내로부터 황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아내를 황후처럼 대해 주면 됩니다. 남편으로부터 황후처럼 대우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황제처럼 대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종처럼 부려야만 내가 황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해 준 것만큼 내게 돌아옵니다.

 

둘째로 실과 바늘의 법칙입니다. 부부란 실과 바늘의 관계라고 비유하곤 합니다. 늘 같이 다녀야 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 역할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느질을 할 때 바늘을 너무 빨리 움직이면 실이 끊기거나 실이 엉키고 맙니다. 바늘이 시원찮다고 실이 바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실로 꿰매놓아야 할 곳에 바늘을 꼽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 하는 모습이 시원찮다고 아내가 대신해버리거나, 아내의 역할을 남편이 다 해버려서도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서로의 역할과 서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수영의 법칙입니다. 땅에서 아무리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영을 배우지 않으면 물속에서 수영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잘하기 위해서는 물속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야 합니다. 사랑과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결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또 아무리 부부문제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통해서 사랑의 이치를 삶으로 깨우치지 않으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없습니다. 문제를 부딪히면서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 풀어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네 번째는 타이어의 법칙입니다. 모래에 빠진 차가 모래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타이어 바람을 조금 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이어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져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의 모래사막에 빠졌을 때 서로 자존심과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야 합니다. 대부분의 부부문제는 자존심과 고집 때문입니다. 그것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상대를 내 스타일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다섯 번째로 김치의 법칙입니다. 배추는 5번 이상 죽어야 김치가 된다고 합니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죽고, 소금에 절일 때 죽고, 매운 고추와 젓갈과 마늘 등의 양념에 버무려질 때 죽고, 그리고 사람 입 안에서 먹힐 때 또 한 번 죽고. 그렇게 5번을 죽을 때 김치는 제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행복의 맛을 내기 위해서도 죽어야 합니다. 최소한 다섯 번은 죽어야 그 가정에서 행복의 맛이 나고 행복의 향기나 납니다.

 

여섯 번째는 고객의 법칙입니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고객에게 친절합니다. 고객을 왕처럼 대해주는 가게는 성공합니다. 요즘 장사를 잘하는 가게에 물건을 사러 들어가면 귀찮을 정도로 친절합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어서 오세요’로부터 시작해서 뭔가를 찾기 위해서 두리번거리면 ‘무엇을 찾으십니까?’라고 물어옵니다. 그러면 손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손님이 와도 왔는지 가는지 아는 체도 하지 않으면 기분이 상해서 다시는 가기 싫어집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는데도 아내가 남편이 왔는지 어쩐지 관심도 없이 자기 일을 하고 있으면 그 남편이 그런 집구석에 들어오고 싶겠습니까? 아내가 힘들 때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런 남편 믿고 살 맛이 나겠습니까? 부부는 서로에게 VIP처럼 대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서비스를 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최고의 고객이라는 생각으로 섬겨줄 때 그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목하게 되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가정을 통해서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 행복을 가장 먼저 맛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조건이 남들보다 더 낫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에 화목함이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은 행복해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 때 하늘의 기쁨을 늘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 평정심은 우리의 의지나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 그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구원의 감격을 갖고 살 때 우리의 가정에는 행복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사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행복을 만들어갑니다. 그게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용서하며 사십시다.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며 사십시다. 가정에서부터 구원의 기쁨이 가득하게 만드는 삶을 사십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가정에서 내 가족부터 소중하게 여김으로 내 가정에 행복이 회복되는 한 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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