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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출애굽기

출 33장 1-11절(사람의 영성의 단계) - 피영민

by Preacher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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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3장 1-11

사람의 영성의 단계

피영민 목사 2015-08-16

http://www.kjb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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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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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영성’(Spirituality)은 기독교 내에서도 대단히 많은 혼란을 야기하는 단어입니다. 가령 “영성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 있다는 의미인지, “영성이 없다”면 무엇이 없다는 것인지 개념정리가 잘 되지 않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영성이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영성’이라는 단어 대신, ‘경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성’이라는 단어는 아주 깊이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단어이고,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용어일 뿐입니다. 그래서 영성은 간단하게 ‘영적인 생활 스타일’이나, ‘영적인 수준’정도의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불자들은 불교 나름의 영성이 있고, 회교도들도 회교 나름의 영성이 있습니다. 또 무당은 무당 나름대로 영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당이 입고 있는 옷은 총천연색이고, 특유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도 불신자 나름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을 영적인 스타일로 볼 때, 영성의 차이는 영적인 생활 스타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기독교인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 영성이 다르면 주일 아침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 가서 예배하자고 하는데, 남편은 잠 좀 자고 천천히 가자고 하다가 부부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 스타일과 수준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부부도 그렇거늘 성도들끼리야 두말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렇듯 영성의 차이는 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32~3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영성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누구를 모델로 삼아야 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영성의 소유자를 기뻐하시는지, 또 어떤 영적 스타일을 가진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2~3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네 가지 종류의 영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Ⅰ. 우상숭배자의 영성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7절에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 사람을 칼로 쳐 죽였는데, 그들의 수가 3,000명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2장 35절에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레위 지파가 죽인 3,000명 말고도 여호와 하나님이 더 죽이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치시고(Strike), 그들이 어떻게 맞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직접 치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었으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4).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이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수라는 권리를 이용해서 정치적인 압박 가하기를 좋아합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언어입니다.

 

아론에게 “너는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선임병사가 후임병사에게 명령하듯 하명합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지시합니다. “너는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아론은 다수인 우상숭배자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세를 언급할 때도 ‘이 모세’라고 합니다. 그냥 모세라고 해도 될 일을 “이 모세는 어찌 되었느냐?”라고 말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어감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모세 이놈은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빈정거림입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업신여기는 발언인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우상숭배적인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대단히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를 개혁가라고 부르지 않고 종교 반란자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무슨 반란을 했습니까? 우상숭배한 자들이 배교한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교회의 위대한 목회자 찰스 스펄전을 향해서도 ‘별똥별처럼 잠시 빛나다가 사라질 종교적 사기꾼’이라고 신문 1면에 대서특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주의 종들을 향해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이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이고, 쾌락적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신 말고, 우리를 위한 신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6절에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어서서는 벌거벗고 뛰놀고, 앉아서는 먹고 마시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색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출 32:34).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곧 처벌할 날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처벌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우상숭배자들이 이생에서는 심판을 받지 않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세는 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 안에 들어온 사상 중 아주 악한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정통주의 신학자 리처드 니버는 ‘자유주의 신학’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습니다. “진노가 없으신 하나님이 죄가 없는 인간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이 없는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진노가 없으시다. 인간이 무슨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처벌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회가 문제지, 인간은 죄가 없다. 다만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연약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질병을 앓고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누군가 하나님께 “동성애가 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동성애가 죄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는 인간의 연약함일 뿐이고, 질병일 따름이다.” 그러나 동성애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죄가 아니라 연약함이라고 한다면 처벌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한 분이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한 자를 처벌하고, 병든 사람을 때린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죄를 죄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헛수고를 했으며, 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죄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함이 아니라 죄를 처벌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말은 사람들이 듣기에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그러나 출애굽기 32장 34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과 전혀 상관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상숭배적인 영성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Ⅱ. 기회주의적인 영성

 

기회주의란 이쪽저쪽 눈치를 보다가 이익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곳으로 달라붙는 것을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33장 1~3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둘째는 천사를 너희 앞서 보내어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내가 너희와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상숭배하는 너희와 계속 함께 거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와 같이 있다가는 너희를 멸절시킬 것이기 때문에 같이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결국 “교회만 나가지 않으면 재벌이 되게 해 주겠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나오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에게 땅, 돈, 젖과 꿀,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고 천사까지 보내주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같이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재벌 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4절에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33장 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 몸에 붙어 있는 금, 은 귀걸이, 장식품 등을 다 빼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장품을 제했다”는 것은 백성들이 외적으로 회개의 반응을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단장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노예생활한 것에 대해 밀린 임금을 하나님이 다 받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막 건설하는데 헌물로 드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데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장품들이 보기 싫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장품을 제할 것을 명하셨고, 백성들은 이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다시는 우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단장품을 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의 회개에 기쁘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회개는 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 다수는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회개는 철저하지 않았습니다. 7절에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8절에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성막에 대한 계시를 받았지만, 아직 성막을 건설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진 밖에 텐트를 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회막’(Tent of Meeting)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영에 거하시지 않으니, 진 밖에 임시처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회막으로 나아갈 때, 여호와를 앙망하는 백성들은 같이 나왔지만, 절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장막 안에 있었습니다. 모세를 따라나서지 않고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관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우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33장 10절에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만들어 놓은 회막에 하나님의 임재, 보호, 인도를 상징하는 구름기둥이 선 것을 본 백성들은 그제야 여호와를 경배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잘 붙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으로 경배한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이들의 회개가 피상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다는 근거는 단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들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장하지 않은 백성들의 회개가 하나님께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절대 다수는 기회주의적인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정체가 확연히 드러난 사건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열 두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우리가 올라가면 죽을 것이다”라는 불신앙적인 말을 했고, 다수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르지 않고 불신앙적인 10명을 따랐습니다. 울지 말아야 할 때 울고, 메뚜기처럼 죽겠구나하며 불신앙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전염병으로 모두 죽이려 하셨지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젖과 꿀도 누리게 해 주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원수도 물리쳐 주시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고 무슨 일이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인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백성들은 그들이 얻고자 했던 가나안 땅도 얻지 못했고, 하나님의 임재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주의는 인생을 망하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편에 굳게 서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기회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도 누리게 되고, 영원한 복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Ⅲ. 타협주의적인 영성

 

아론은 백성도 기쁘게 하고 하나님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중도주의’입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좌파를 하려면 좌파를 하고 우파를 하면 우파를 하지, 중도노선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지 않으려면 믿지 말고,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어야지, 이것은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보험이 아닙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백성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 후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 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튿날을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비록 우상 앞에서라도 절기를 지키고 예배를 하면,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모두 기쁘게 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중도노선은 필히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위선과 타협, 거짓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절기가 아닌 것을 절기라고 가르쳤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단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진노와 재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론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것 자체를 취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째, 둘째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아버지에게서 이런 종교혼합주의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0장에 보면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할 때 사용해야 하는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이 나와 타 죽고 말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장례식을 집례 하였는데, 가장 비참한 경우가 불에 타 죽은 것이었습니다. 염을 하는데 눈을 뜨고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그렇게 죽은 것입니다. 아론은 타협주의적인 영성을 가지고 있다가 두 아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뭐 그리 중요하냐? 사람만 많이 모이면 되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물론 얻는 것이 많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잃는 것으로 인한 고통이 더욱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이런 타협주의, 중도주의 노선을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성은 어떤 것일까요?

 

Ⅳ. 하나님의 임재를 앙모하는 영성

 

모세는 이스라엘 진영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음을 알고 진 밖에 회막을 치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매우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모세와 친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회막에서 두 가지 간구를 드렸습니다.

 

첫째, 주의 길을 보이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천사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임재하시며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땅도 좋고 집도 좋고 자식도 좋고 모든 복이 다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1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가나안 땅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각종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주의 영광을 보여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기도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얼굴을 보면 죽게 되기 때문에 반석 틈에서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것도 큰 반석 틈 사이로 하나님의 등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의하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반석의 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몸이 찢기시고 수난 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평안한 마음을 주시고, 때로는 육신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기도생활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반석 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도 보게 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됩니다. 이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19절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백성들에게만 이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반석의 찢어진 틈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영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여호와를 앙모한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기도하며 사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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