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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출애굽기

출 33장 1-6절(셀프 인생과 더불어 가는 인생)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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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3장 1-6

셀프 인생과 더불어 가는 인생

안효관 목사 2015-02-2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우리나라 시간으로 지난 2월 15일(주일)에 프랑스의 프로축구 캉과 파리 생제르맹 경기가 파리에 있는 리게앙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 경기 시작 2분만에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c)라는 선수가 골을 터트힌 후에 골 세리머니를 하면서 티셔츠를 벗었습니다.<사진1>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왜 이브라히모비치가 티셔츠를 벗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국제축구연맹인 FIFA의 규정에 의하면 골 세리머니를 하면서 티셔츠를 벗을 경우 경고를 받게 됩니다. 이브라히모비치는 지난 경기에서 경고를 한 번 받았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또다시 경고를 받으면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됩니다. 프로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규정을 이브라히모비치가 모를리 없음에도 그는 티셔츠를 벗었고, 결국 경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티셔츠를 벗은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었습니다. 그의 온 몸에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시아타, 카르맨, 라흐마, 안트완, 리다. 체우이, 말리코 등.’ 아무리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팬이라 하더라도 그 뜻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브라히모비치가 티셔츠를 벗는 골 세리머니를 한 이유와 그의 몸에 새겨진 이 글자들의 의미가 밝혀졌습니다. 유엔의 기아퇴치 기구인 세계식량계획(WFP)이 그의 골 세리머니를 담은 동영상을 배포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영상의 제목은 ‘8억 5천만 명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영상에서 당사자인 이브라히모비치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글자들은 캄보디아, 라이베리아, 남수단, 볼리비아 등지에서 매일 굶주림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긴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저를 알아보고 제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도 있습니다. 오늘도 전 세계에 굶주리는 사람이 8억 5천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저는 세계 곳곳에 팬들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저를 향한 응원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제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생각할 것이고, 저를 볼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생각할 것입니다.’

 

참으로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8억 5천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1/9이 먹을 음식이 부족해서 고생하고 있고, 때로는 음식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브라히모비치는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몇 백 억의 연봉을 받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인기나 부유함에 편승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식량계획(WFP) 총재와 합의하에 다음 경기 출장 정지라는 징계를 받는다 하더라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하려고 그런 골 세리머니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또 하나의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사진입니다.<사진2> 지난 해 10월 용인제일초등학교 가을운동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학교 6학년에 다니던 김기국이라는 아이는 연골무형성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에서 늘 꼴찌를 도맡하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같이 달리던 4명의 아이들이 순위를 다투며 달리고 있었고, 기국이라는 아이는 역시나 저 뒤쪽에서 꼴찌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승선에 가까이 다가간 아이들이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고 되돌아서 저 뒤쪽에서 천천히 달려오는 기국이라는 아이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기국이의 손을 잡고 다섯 아이가 함께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한 신문에 실리면서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사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지극히 당연한 모습 가운데 하나여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경쟁하는 데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우리 사회는 ‘더불어’라는 이 아름다운 단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갑니다. 가족이 있지만 가족의 친밀함이 사라지고, 친구가 있지만 진정한 친구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홀로 걷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셀프(Self)’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주도적인 인생을 살라는 뜻이 담겨진 말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외로운 우리의 모습이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긴 인생의 여정을 갈 때 홀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 삶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때론 싸우며 갈지라도, 때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등을 돌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어느 순간엔가는 가족이 내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가는 내 가까운 친구가 내 손을 잡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전혀 낯선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 우리가 늘 모시고 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동행하신다면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난관 앞에 선다 하더라도 우리는 담대하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손을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안다면, 때론 힘들고 고달픈 삶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즐거이 찬송을 부르며 우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출애굽기 19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까지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엄청난 기적들을 베푸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3일쯤 되었을 때 마라에 도착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쓴 물이 나오는 마라의 우물을 달게 만드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지 한 달 쯤 지나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하루 이틀만 만나를 주신 것이 아니라 광야 생활하는 내내 그들에게 매일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내산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시더니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시내산 아래로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모아놓고 하나님의 의도를 전달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들을 들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계명들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4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이 체결됩니다. 그것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은 후에 모세는 다시금 시내산 위로 올라갑니다. 좀 더 구체적인 계명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간 지 40일쯤 지났을 때 시내산 아래에서 일이 벌어집니다. 시내산 위로 올라간 모세가 40일이 지났음에도 내려오지 않자, 시내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죽었는지 몰라. 왜 지금까지 안 내려오지? 모세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가 만들자.’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졸라댑니다. 백성들의 성화에 아론은 금고리를 모아 가져오라고 하고선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만들어놓고 그 금송아지에게 번제를 드리며 금송아지를 섬기게 됩니다.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빨리 시내산 아래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급하게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시내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제사를 드리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서 너무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를 불사라 부숴버리고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40일 전에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 계명이 ‘새긴 우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계명도 어겼고, 새긴 우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계명도 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레위 자손들에게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칼로 죽이라고 해서, 그 날 3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언약을 맺은 후에 그 언약을 어기면 그 사람은 언약을 어긴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값을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치루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이스라엘 백성은 3천 명 가량이나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모세가 다시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단단히 화가 나신 상태였습니다. 시내산 위에 올라온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백성을 이끌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단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진 않겠다.’ 그것이 오늘 본문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기에 그 땅에 들어가게는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진 않지만 그래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이 준엄한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준엄한 말씀’이라는 말은 ‘불길한 말씀, 언짢은 말씀, 또는 슬픈 말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면 아무리 가나안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기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애굽에서 탈출할 수도 없었고, 홍해가 가로 막고 있을 때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어쩌면 애굽 군사들의 칼날에 모두 죽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셨다면 광야에서 목말라 죽든지 굶주림 때문에 죽든지 모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광야생활하던 도중에 낮의 무더위나 밤의 추위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지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시긴 하지만, 함께 가시진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슬픈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슬픔의 표시입니다. 아무리 목적한 바 가나안 땅에 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건 분명 슬픈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하여 하나님께서 맘을 바꾸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4절)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의 그 고달픔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 고생을 참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어. 조금만 참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실거야!’ 그런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생하는 삶을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소망이 있다면,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룰 강한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때로 힘들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때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성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진장한 고통을 견뎌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실패하도 다시 도전합니다.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목표가 분명하고, 그래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간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하는 것이든, 아니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 아니면 승진하는 것이든 우리가 가슴 깊이 소망하는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거기에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 홀로 그 성공의 자리에 서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취업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취업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공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을 오히려 외면한 채 달려가는 데만 열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홀로 열심히 달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내가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기 위해서는 가족이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어울릴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오직 성공하기 위해서 일만 합니다. 자식을 잘 되게 만들겠다고 아빠를 기러기 아빠로 만들어놓고 엄마와 아이들만 유학을 가기도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목표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누구와 함께 그 길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일한다 하면서 가족들에게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이 진정 가정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을 위한다면 조금 늦게 가더라도 가족이 함께 가야 합니다. 고생을 해도 함께 해야 하고, 슬픈 일을 겪어 나갈 때에도 가족이 함께 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자 목표를 세웠다면 그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목표를 세운 것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형통한 길로 인도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진진하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 하나님과 함께 왔느냐?’고 말입니다. 내가 걸어온 그 길에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룬 그것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셀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 혼자 내 삶을 개척하고, 나 혼 자 홀로 우리의 인생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의 길입니다. 때론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 십자가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그 길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 아니라면 그 길의 마침은 멸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는 모두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몸 단장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비록 그들의 목표인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40일 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한 백성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가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의미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우리의 모습보다 훨씬 더 나은지도 모릅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계십니까? 지금 그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까? 내가 목적하는 것을 다 이룰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지 않으면 내 삶은 무가치로 끝나고 맙니다. 내가 목적하는 바를 다 이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그 길에 하나님과 함께 간다면 목표한 것을 다 이루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달려가는 그 길이 내가 목표하는 지점까지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간다면 내 인생은 그 누구보다도 보람된 삶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찰리 스미스(Charlie Smith)라는 흑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842년에 아프리카 라이베리아(Liberia)에서 태어난 그는 13살 때인 1854년 미국에 와서 138세를 살다가 197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예로 미국 땅에 와서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으로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는 그 후에도 한 동안 노예로 지내던 그 목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삶은 고통의 전시장과도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온 이후 미국의 남부와 서부를 헤매며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어 죽을 고비를 스무 번도 넘게 경험했다고 합니다. 한때는 서부 최고의 총잡이였던 제시 제임스의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138년 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찰스 스미스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자신을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났음에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도 감사합니다. 138년 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 삶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그런 멋진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십시다. 내가 가는 내 인생길은 나 홀로 걷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 하나님을 늘 바라보며 사십시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길만이 내게 평안을 주고, 행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그 길만이 내 인생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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