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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출애굽기

출 34장 1-9절(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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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4장 1-9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

안효관 목사 2019-08-18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우리가 잘 아는 구약성경의 요나는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라고 하면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선포해야 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다시스로 가던 배를 타고 가던 도중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그 풍랑의 원인이 누구 때문인지 알기 위해서 제비를 뽑자 요나가 걸렸습니다. 요나도 자신 때문에 이 큰 풍랑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당연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로 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느니웨로 가겠다는 생각 대신에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제안합니다. 자신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면 풍랑이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정도로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니느웨는 최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데, 앗수르 제국으로 인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겪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통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득한 죄악으로 그 땅을 심판하신다면 이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서 혹시라도 니느웨가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보다,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을지라도 니느웨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그런 생각은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깨어지고 맙니다. 배에 타고 갔던 사람들이 요나의 요청대로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이야기는 끝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3일 동안 머물며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자, 하나님께서 다시금 요나에게 명령하십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말입니다.

 

요나서 3: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기회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니느웨로 갈 수 있는 기회, 아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면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순간 그의 생명은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선지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불순종의 아이콘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12만 명이 넘는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12만 명이 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이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다신 한 번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다시 도전하게 하시고, 다시 한 번 해 보라고 기회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한 번 넘어졌다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낙인찍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수할 때 그 한 번의 실수로 우리 인생이 망하도록 내팽개치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까지 우리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새로운 뭔가를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는데, 그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를 통해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제 광야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400년 동안 종살이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 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그들은 사실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역사 가운데서 3개월 만에 시내광야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위로 올라오라고 하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으시는 언약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격적인 관계에서 쌍방의 언약을 맺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그런 의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3개월 동안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막강한 애굽 왕 바로의 코를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마차를 타고 뒤쫓아오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고, 애굽의 군사들은 그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광야생활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 고생하다가 우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우물의 물이 너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모세를 통해서 한 나뭇가지를 우물에 던져 물을 달게 변하게 하시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광야생활이 길어지면서 그들이 애굽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음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굶어 죽지 않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먹고 싶은 만큼 충분히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에는 반석을 깨뜨려서 물을 마시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비록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 모든 일들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지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렇게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해 주시겠다는데 어찌 언약을 맺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언약백성이 된다면 이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약속의 땅까지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을 맺고 난 후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구체적인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시내산 위로 올라갔고, 40일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의 세부사항들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핵심인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십니다. 돌판 하나에는 십계명 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규칙인 1-4계명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인 5-10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두 개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글을 쓰신 것입니다.(출애굽기 31:18, 32:16)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셔서 써 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두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던 모세가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제사하면서 술에 취해 온갖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너무 화가 나서 하나님께서 써 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과 40일 전에 하나님과 한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범죄한 백성들은 징벌을 받아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부터 앞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는 표시로 몸에 걸쳤던 장신구들을 모두 떼어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의 핵심인 십계명 돌판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돌판을 주신 때와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첫 번째 십계명의 두 돌판을 주실 때에는 그 돌판을 준비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그 돌판 두 개에다가 십계명의 글씨를 직접 써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주실 때에는 글씨를 쓰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그 돌판을 준비하는 것은 모세의 몫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돌판은 모세에게 직접 준비하라고 하셨을까요? 정교하고 아름다운 돌판을 원하셨다면 모세가 만든 것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훨신 더 멋지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일류 석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빚으신 것보다 정교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석공도 아니고, 돌을 다듬어 빚을 만한 어떤 도구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직접 두 번째 돌판을 두 개나 다듬어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듬어 만든다’는 말은 깎아서 정교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대충 글자를 새길만한 아무 돌이나 주워서 가져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돌을 정교하게 깎고 다듬어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아침까지 준비해서 아침에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돌판을 준비했습니다. 4절에서는 모세가 다듬어 준비한 그 돌판을 아침 일찍 손에 들고 시내산으로 올라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침 일찍 깎고 다듬은 돌판 두 개를 가지고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어쩌면 모세가 밤새도록 그 돌을 깎고 다듬었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는 석공도 아니고 돌을 다듬을 만한 어떤 도구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돌판과 비슷하게 정교하게 다듬어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산으로 가져갑니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말은 잠을 자가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열심히, 부지런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였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모세에게 둘판을 준비하라고 하셨을까요? 모세가 그 돌판을 준비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힘들게 돌판을 준비했습니다. 돌판을 하나도 아닌 두 개씩이나, 더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처음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왜 그 힘든 일을 나더러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면 훨씬 더 쉽고 멋지게 만드실 수 있을텐데, 왜 굳이 나에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첫 번째 돌판을 깨뜨린 것은 모세였습니다. 비록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분노의 표시였지만, 하나님께서 돌판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고, 그걸 깨뜨려 이스라엘의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라고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모세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분노의 마음으로 돌판을 던져 깨뜨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고 분노한 모세가 그 돌판을 던져 깨뜨릴 때 왜 그걸 깨뜨리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잘했다 잘못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수고스럽지만 모세에게 돌판 둘을, 그것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어오라고 하신 것은 그런 모세의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뜻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의 의중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돌판 두 개를 준비해서 아침 일찍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돌을 깎고 다듬으면서 모세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모세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돌을 깎았겠습니까? 아마도 돌을 깎는 모세의 심정은 자신의 마음을 깎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고 계시지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깎아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마련해 주신 첫 번째 돌판을 깨뜨린 이유는 자신의 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그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뭔가 당신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은 단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태초에 우리 인간을 진흙으로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천지도 말씀 한 마디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곱게 곱게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은 그 두 개뿐입니다. 십계명 돌판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혈기로 그 소중한 돌판을 깨뜨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두 개를 깎고 다듬으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그 첫 번째 돌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돌판을 깨뜨려버린 것이 바로 자신의 혈기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혈기를 부리는 것이 그 소중한 것을 잃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큰 고통을 스스로에게 주는지를 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분노로 혈기가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악에 대한 분노라 하더라도 혈기를 마음대로 부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혈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야고보서 1:20)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정의를 위해서 분노한다 하더라도 절제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분노가 결국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을 만들되 첫 번째 것과 같이 만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듬으신 그 돌판처럼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모세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주신 그 모습 그대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갈아엎고 다듬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처음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믿음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수 없이 많이 실수하고 넘어졌습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도 말입니다.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속였습니다. 자신이 죽임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애굽 왕이 자기 아내를 데려감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아 비극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40년 이상 갈고 다듬어진 후 모리아산에서 자기의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 40여년의 시간 동안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넘어지고 실수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과정 속에 그는 연단을 받았습니다. 깎이고 다듬어지는 연단의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실패한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넘어지지 않고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자신이 믿음의 사람으로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두 번째 돌판을 우리 스스로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없이 많은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다듬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복된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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