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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학개

학 1장 1-11절(성전을 건축하라) - 최태선

by Preacher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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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1장 1-11

성전을 건축하라

최태선 목사 2015.3.22.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릅니다. 교회 안 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최근 들어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니 관심이 증가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청어람 아카데미 대표인 양희송은 가나안 성도들과 기존 목회자들 간에 심각한 시각차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떠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이들은 교회를 떠나면서 죄책감보다는 교회로부터 탈출했다는 해방감을 가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면서 그곳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신앙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교회를 떠났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에 죄책감이 아니라 해방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양 대표는 가나안 성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신앙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신앙적 이유로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70~80%는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그는 기존의 교회들이 잘못된 모습들을 버리고 다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교회를 떠났던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존의 교회들이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 역시 올바른 교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떠나는 과정에서 가나안 성도들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치명적인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은 이스라엘 왕정 이전의 사사기 시대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진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머리 되심 그리고 그분의 통치가 사라진 것이고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그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도록 관심을 갖고 주목해온 그들 가나안 성도들에 대해 조금 더 비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들이 복음이 말하는 교회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교회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방관하는 자세에서 오는 편리함과 아까운 돈에 대한 집착과 헤게모니 싸움에 밀린 것이 그들을 교회로부터 떠나게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진리에 대한 영적 목마름으로 그렇게 된 이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자신들만이 올바르다는 자의식에서 오는 영적 엘리트주의와 결과적으로 또 다른 분파를 형성하게 되는 함정으로부터 헤어나는 일 역시 그들이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현실적 과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나안 성도라는 말 자체를 거부합니다. 가나안은 그들의 선택이지만 그들이 과연 성도로서 기능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그들이 성도가 될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회복하고, 성령에 이끌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또 다른 낙관주의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성도가 진짜 성도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은 오직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을 온전히 주님으로 따르는 참된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관건은 인간인 우리가 그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것은 분명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일단 선택이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결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일원이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공동체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진정한 제자도에 대한 개인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반드시 성령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대안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 복음이 말하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학개서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학개

 

학개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학개는 학개서 외에 에스라서에 두 절, 5:1과 6;14에서만 언급됩니다. 학개란 이름은 "명절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학개의 활동연대는 날짜가 정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 제2년"은 주준 520년입니다. 학개는 주전 520년 8월에서 12월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학개서의 일관된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유다가 현재 겪고 있는 경제적인 황폐함은 성전을 황폐하게 방치한 결과하는 것입니다. 이는 학개의 독특한 신학입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이 자신의 주거환경 개선보다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학개서의 핵심 메시지는 "자신의 필요에만 몰입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본분 (학개서에서는 성전 재건)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입니다.

 

배경

 

학개가 전한 말씀에는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모든 말씀은 학개가 바사 와 다리오 1세 제2년에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전 539년 바벨론(바빌로니아)은 바사(페르시아)에게 망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던 유다 백성들은 졸지에 지배국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주전 538년에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고레스의 칙령입니다. (스1:2-3 참조 6:3-5)

 

유다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스3:8-10) 하지만 이 공사는 유다 땅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과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결국 중단되고 맙니다. 공사 중단 상태는 그 외의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학개가 등장하는 주전 52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스4:23-24)

 

성전재건은 주전 538년 유다 백성을 귀환시킨 고레스가 내린 명령의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임무는 거의 18년 동안 유명무실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520년 학개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그의 사명은 유다 백성들이 망각하고 있던 성전재건의 임무를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학개는 유다 땅에 머물렀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 백성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스룹바벨은 다윗 가문의 왕 여호야긴의 후손으로 바벨론에 잡혀갔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사닥의 아들로서 역대상 6:15에 따르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바벨론 왕에게 붙잡혀 리블라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레의 제사장 계통에 속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왕족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 가문입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정치와 행정을 책임지는 정치지도자이고, 여호수아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직무를 책임지는 종교지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는 학개와 달리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학개가 이들에게 선포한 이유는 이들이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이 성전재건을 독려해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의 저항

 

그런데 학개의 외침은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백성들은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면 성전재건을 언급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2절 말씀입니다. 물론 당시 유다 백성들이 성전재건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총독과 대제사장은 지금이 성전재건의 적기라고 말하는 예언자와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백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학개는 아직 성전재건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1:4)

 

이 말씀을 원문이 말하는 대로 직역하면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너희를 위해서 이 때에 판벽한 너희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입니다. 너희라는 인칭대면사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롱조의 반문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하나님의 성전에는 무관심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유다 백성들의 이기주의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황무한 하나님의 집"과 "판벽한 백성의 집"이 대조를 이룹니다. 황무란 최악의 황폐화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판벽"은 그 판단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판벽이라는 히브리어 '세푸님'은 '호화로운' 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소박한 '덮개'라는 의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학개서의 정황으로 보면 소박한 덮개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개는 "백성들의 지붕 덮인 집"과 "지붕도 없이 폐허가 된 하나님의 집"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학개는 지금 하나님의 집을 지붕 하나 없이 폐허가 된 채로 내버려두면서 자신들은 지붕이 덮인 집에서 편안히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옳은 태도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백성들은 대부분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었습니다. 모든 경제생활에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6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농작물 경작의 실패, 식량 부족,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낡고 헤진 의복, 물질 부족 등으로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학개가 제시하고 있는 다섯 가지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행하는 삶의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이런 기본생활을 위한 필수적인 일들이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모든 것이 헛수고입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입니까?

 

학개의 역설

 

여기서 우리는 학개의 역설과 만나게 됩니다. 귀환한 유다 백성들을 그들에게 주어진 성전재건이라는 임무를 저버리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을 먼저 짓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것만큼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9절은 그것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9)

 

먼저 곤경에 처한 상황을 진술하고,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합니다. 그 가운데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라."는 희화적 표현은 자신이 거하는 집, 그리고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의 자기 재산을 다사 확보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 자기 집의 내장과 외장을 꾸미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보다 자신의 집과 자신의 집안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곤궁한 삶이 성전재건의 때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학개의 해석은 그와 정 반대였습니다. 성전재건의 무관심이 곤궁한 삶의 근본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학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시간도 노력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백성의 빗나간 열정과 이기적인 삶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빗나간 열정이 인생의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빈궁과 곤고함이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여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10-1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언어의 유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인 "한재"와 성전의 "황무"에 사용된 단어가 똑같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재(호레브)와 황무(하레브)는 히브리어로 써놓으면 똑같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황무함이 그들의 한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한재는 임무를 저버린 자신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라

 

학개는 구체적으로 유다 백성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내립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8)

 

이전의 솔로몬 성전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고급스러운 수입목이었습니다. 또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성전의 기초석을 삼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태리 대리석을 사용한 것입니다. 외국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건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학개는 그런 고급 재료들과 최고급 인력 자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뒷산의 나무입니다. 돌은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건축전문가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는 2:3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역시 결과는 시시했습니다. 예전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지어놓은 성전을 보고 울었습니다. 너무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상태를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저가 가장 많이 하였도다.'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학개는 단순히 건물을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적 기능만을 되살리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베푸실 수 있도록 성전을 재건하라고 한 것입니다. 성전은 축복의 통로이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성전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으로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학개서에서도 똑같은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전재건의 임무

 

그러므로 성전재건의 임무는 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황무해졌습니다. 물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종탑과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어진 교회 건물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벨탑과 아방궁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난무하는 소송을 통해 오늘날 교회는 스스로가 교회가 아님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부침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당신의 교회를 다시 세울 사람들을 찾고 계시고 준비하십니다. 12세기 타락한 교회를 다시 세우고자 하나님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세운 다미안 성당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거하시고 함께 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프란치스코의 정신은 수많은 영적인 사람들에게 이어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황폐한 도시와 넘치는 빈민들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고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형제의 처소라는 브루더호프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리고 있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 저는 이 시대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님들에게도 이 주님의 음성이 꼭 들리기를 바랍니다. (다시 돌아가거나 비난만 하지 마시고)

 

오늘도 여러분에게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나 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산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시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보잘것없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 하나 꽃 피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황무한 교회를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셔야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그리고 오직 유일한 예물임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 하나 꽃 피고 나 하나 물드는 그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어쩌면 우리도 꽃밭을 보고 활활 타오르는 산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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