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2장 9, 사43장 18-21
큰 영광을 보리라!
조성노 목사 20150111
푸른교회 [분당 불정로] http://thegreen.or.kr/
(학 2:9, 개정)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3:18-21, 개정)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얘깁니다. 주님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대신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여인을 정죄하며 돌을 던지려했는데, 주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며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용서하셨을까요? 그 여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아직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그 여인의 죄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기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며 또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비록 오늘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간음죄를 지었지만, 앞으로는 누구보다 순결하게 살 수 있는 내일이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돌을 던져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던져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는데, 어제 죄 짓지 않은 사람 있냐는 겁니다. 주님이 땅바닥에다 뭔가를 썼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여인과 관계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님은 오늘은 죄인이지만, 내일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신 겁니다. 간음한 여인이 정말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맞다면, 주님의 그 기대와 바람처럼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까?
이 사건 이후로 주님 가까이에서 보좌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지키고, 무덤을 확인하고, 안식 후 첫 날 향유를 갖고 무덤을 찾았다가 최초로 빈무덤을 발견하고, 그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납니다. 오욕의 생활을 하던 간음녀에게 주님은 용서를 선언하시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여인에게서 희망을 보신 겁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과거의 잣대로 단죄하지 않고 미래의 빛 앞에서 가능성의 눈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에게는 용서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내일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를 잣대로 판단합니다. 주님은 네가 여전히 살아 있는 한 내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테니 가서 잘 살라고 하십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고정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희망을 없애는 겁니다. 주님은 철저히 살아 있는 사람을 살아 있는 그대로 보셨지 죽여서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생물입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지금 여기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당입니다. 교회가 회집되어 예배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시설이 아닙니다. 유기체입니다.
교회를 신약성경은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사회학자는 사회를 게젤샤프트(Gesellschaft),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라고 합니다. 게젤샤프트는 사회조직, 체제를 말합니다. 게마인샤프트는 사회를 유기체로 본 겁니다.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독일 같은 경우에는 각 개 교회를 게마인데, 즉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교회 일반을 부를 때는 키르케(Kirche) 라고 부르지만, 각 교회는 게마인데(Gemeinde)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보실 때도 항상 내일이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보십니다. 우리는 때로 자학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비하합니다만, 주님은 절대 우리를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내일이 있는 존재, 희망이 있는 존재로 보십니다.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며 희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개인에 대해서도 공동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격려하십니다.
주님의 격려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주님은 우리 교회에 대해 약해지지 않으셨습니다. 큰 희망을 갖고 우리 교회를 지켜보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올해도 우리 교회를 향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고 하십니다.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영광과 평강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약속을 이사야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43장 18절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지난 일은 누구나 다 부끄럽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돌 맞지 않을 자신이 있는 분 계십니까? 과거로 오늘 나를 심판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무사할까요? 다행히도 주님은 우리를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희망의 빛에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이전의 부끄러운 일들, 온갖 실수와 과오와 죄악을 다 용서하신다고 하면서 더는 그런 것들에 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뒤엣 것은 잊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게 믿는 자들의 실존입니다. 뒤돌아 보지 마십시오. 뒤돌아 보다가 영원한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잊지 마십시오. 날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작당하다가 망한 아간과 그의 추종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으십시오. 내일이 없는 사람은 오직 과거 얘기만 합니다. 올해는 과거는 다 잊고 앞만 보고 나아갑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라고 합니까? 19절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주님이 이루실 새 일을 보라고 합니다. 새 일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반드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는 것입니다. 올해 주님이 행하실 새 일은 광야에 새 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큰 길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새 일을 미리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반드시 척박한 광야에 대로를 닦으실 줄 믿습니다. 사막에 큰 강이 흐르게 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새 일을 바라보고 거기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 가장 먼저 정복한 원주민의 성읍이 여리고성입니다. 어떻게 함락시켰습니까? 성을 돌고 마지막 날에 함성을 질러서 함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이 분부하신대로 날마다 성채를 한 바퀴씩 돌다가, 일곱째 날에 7바퀴 돌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함성을 질렀다는 것은 기를 모았다는 겁니다. 뜻을 같이 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염원하는 일을 한 지점에 집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서 기도하면 무엇이든 맬 수도 풀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큰 영광, 우리 앞에서 행하실 주님의 새 일에 집중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이루시는 일을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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