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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사도행전

행 28장 11-22절(복음의 통로가 되는 나의 발걸음) - 권율

by Preacher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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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8장 11-22

복음의 통로가 되는 나의 발걸음

권율 목사 2017. 4. 7.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부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1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바울 일행은 “그 섬”(멜리데)에서 석 달간 체류하고 있다가, 겨울을 보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11절). 이때는 지중해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3월인데 주후 60년경을 가리킵니다(ESV Study Bible). 그리고 수라구사(Syracuse)라는 도시에 3일 동안 있다가(12절), 그곳을 둘러가서 레기온(Rhegium)에 도착해 하루를 지냈습니다. 때마침 다음날 남풍이 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어서 곧바로 보디올(Puteoli)로 갔습니다(13절).

 

신기하게도 그곳(보디올)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요청으로 7일 동안 함께 머물러 있다가, 드디어 로마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14절). 15절에서 보듯이, 보디올 형제들은 바울 일행의 소식을 듣고 친히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그 순간 사도 바울은 예상치 못한 형제들이 자신들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복음 사역을 위해 더욱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직 로마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보디올에서도 성도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십자가의 복음이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에 전해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곳을 떠나 며칠 후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로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특별한 죄목이 없었기 때문에 감금되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군인과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16절).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는 순간, 3년 전 고린도에서 쓴 서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해는 주후 57년경인데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 중에 로마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복음의 정수(精髓)를 보여 주는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바울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가려는 “좋은 길”을 사모했으며(1:10), 또한 그들에게도 십자가의 복음을 간절히 전하기 원했다는 것(1:15)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로마에 입성한 것입니다. 그가 로마로 가는 “좋은 길”을 하나님께 구했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고난의 길을 그에게 허락하심으로써 그의 기도제목에 응답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죄수의 신분으로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길은 바울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죄가 없이 동족들에게 잡혀 십자가를 지셨듯이, 하나님의 종 바울도 특별한 죄목도 없이 동족들에게 잡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해야 할 때만이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효력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가 실천하는 영광스러운 고난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그토록 소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에게 가장 좋은 길, 십자가의 길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에 도착한 지 “사흘 후에” 그의 간절한 소망대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17절a). 복음을 본격적으로 전하기에 앞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17절b). 오히려 로마인들은 바울을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어서 석방하려고 했지만(18절), 유대인들이 극구 반대하여 자기가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지, 결코 자기 동족을 고발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변호합니다(19절).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 고관들을 청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20절a). 마침내 바울은 자기가 쇠사슬에 매인 까닭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자신이 쇠사슬에 결박당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20절b). 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τῆς ἐλπίδος τοῦ Ἰσραὴλ)이란 무엇입니까? 즉 다윗의 혈통으로 메시야가 오신다는 그 소망입니다. 그가 평소에 증거한 바와 같이, 또한 우리도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그 소망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이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가 지금 누구 때문에 쇠사슬에 매여 죄수의 신분이 되었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동족 유대인들이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당국에 고발한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죽이려고 사생결단한 그들이 고발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쇠사슬에 매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 때문에 쇠사슬에 결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소망을 유대인들이 제대로 깨달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죄수의 신분에 매여도 전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3년 전에 기록한 로마서에서 똑같은 심정으로 말한 바가 있습니다. 자기 형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말했습니다(9:3; 10:1).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주님께 버림받아 또다시 죄의 사슬에 매여도 자기 동족의 구원을 소망한다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의 모습을 참으로 닮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해 십자가의 사슬에 매인 바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대적하는 그들의 ‘소망’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하시는 그 숭고한 모습이 오늘 본문의 바울에게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땐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 고관들에게 눈물을 머금고 마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바로 사도 자신처럼 제대로 깨닫기를 소망하는 그 마음을 그들과 나누기 원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동족 유대인들부터 청한 바울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5)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진정성이 그들에게 전달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반응이 의외로 호의적입니다. 21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그러니까 바울에 대해 이상한 소문 같은 걸 아직 들은 적도 말한 적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22절에서 보듯이,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사상이 어떠한가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사역을 위한 바울의 발걸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가 이동하는 경로는 단순히 한 사람이 지중해 전역을 여행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제대로 경험한 한 사람이 그 발을 내딛는 곳은, 생명의 복음이 전해지는 위대한 통로가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발걸음 내딛는 과정이 힘겨울 수 있습니다. 또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바로 그러한 수고와 고난의 발걸음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복음 때문에 원치 않는 상황에 매일지라도, 바로 그러한 상황 때문에 나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참 이스라엘의 소망이 전해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발걸음이 복음의 통로가 되는 위대한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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