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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호세아

호 6장 1-3절(이틀 후와 셋째 날의 감사)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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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6장 1-3

이틀 후와 셋째 날의 감사

안효관 목사 2017-07-0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孔子)가 젊을 때 길을 가다가 좀 이상해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이 노인은 계속 싱글벙글 웃고, 심지어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이상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떤 노인이기에 사람들이 저리도 예의를 다해 인사를 하는 거지? 이 나라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또 다들 나를 존경하는데, 나를 보고는 인사를 안 하고 언뜻 보기에 정신 빠진 저 노인에게 다들 인사를 하는 것일까?’ 그래서 공자는 노인에게 다가가 공손히 절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즐거워하시며, 또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는지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허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 양반이 무던히도 배우고 싶어 하는구먼. 내가 생을 감사하는 이유는 첫째, 뱀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돼지나 개로도 태어날 수 있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그저 감사하네. 둘째는 내가 90세가 넘었는데 건강하게 지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셋째는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즐겁게 일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해서 일하다가 쉴 때는 즐거워서 춤도 추는 것이라네.”

 

여러분,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자가 만났다는 그 노인처럼, 90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아야만 인생이 즐거운 것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90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모두 그 노인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실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춤을 추며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디 그것뿐입니까? 비록 우리가 그렇게 나이 많도록 건강하게 살진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귀한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경 속의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수고나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들인데, 그런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그 은혜에 감격하여 싱글벙글하며 하늘 기쁨을 안고 행복의 춤을 추며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때로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힘들게 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인생의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평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늘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야 하고, 겪고 싶지 않는 일들을 겪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면 우리의 마음에 불평의 소리가 들려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신음소리에 절규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세요?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끝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것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것 또한 어느 순간엔가 우리 곁에서 떠나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혜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반지에 새겼다는 그 말,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그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명예와 기쁨의 순간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슬픔과 고통과 힘든 것들도 어느 덧 지나가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2절) 때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처럼 고통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채찍에 맞은 것처럼 깊은 상처로 인해 신음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우리의 욕심에 노예가 된 채 우리가 가고 싶은 길로 가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며 살 때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 늘 하나님을 배신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것만이 그들이 살 길이라고 외쳐도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을 멸망이라는 징계를 통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멸망의 채찍을 내리치시면 그만입니다. 돌아오라고 외치실 필요도 없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는 그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 섬기기를 포기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워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로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잠시 고통을 주시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찢으셨다.’는 말은 사자가 먹잇감을 사냥한 후에 그것을 먹기 위해서 찢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세상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깊은 수렁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낫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앉아 있지 말라고, 상처 나고 찢겨진 상태로 절망 가운데 한숨 쉬며 앉아 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모든 것이 포기된 상태에 놓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십니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다시금 활동이 왕성했던 그 모습 그대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틀’과 ‘셋째 날’이라는 말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시는 것이 빠르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고통을 당할 때 언제까지 그 고통이 계속될지 알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강도보다도 끝날 날을 알지 못한 두려움이 더욱 그를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이틀만 참으면 끝난다.’는 확실한 보장만 있으면 힘든 것 참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는 데, 이삼일 정도만 지나면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끝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고통 가운데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때론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등지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결코 우리에게 영원한 징벌을 내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리기만 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고통 가운데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의 찢긴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3일만 참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싸매주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도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너무 힘들어 고통 가운데 울부짖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조금 힘들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자에게 먹잇감이 찢기는 것처럼 찢겼다 하더라도 싸매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당하는 그보다 작은 고통과 아픔을 어찌 회복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래 전(1999년) 한 소방관과 함께 찍힌 개의 사진이 큰 화제를 일으켰습니다.<사진1> 이 사진이 찍힌 사연은 이렇습니다.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화재가 발상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롯 소방서에 근무하는 소방관 제프 클락(Jeff Clark)은 화재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불이 난 집에 도착했지만 불은 이미 거세게 일고 있었습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 고립되어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개는 사냥개로 유명한 도베르만(Doberman pinscher)이었습니다. 집안에 불이 사방으로 번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도베르만은 큰 소리를 짖어대기만 했습니다. 그는 도베르만이 무서웠습니다. 워낙 무서운 사냥개인데다가 화재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 있어 그 개가 어떤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길 속에 있는 생명을 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그는 급하게 도베르만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불길 속에서 도베르만이 창밖으로 뛰어 도망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도베르만이 새끼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도베르만을 품에 안고 불길 속을 빠져나왔습니다. 도베르만을 무사히 구해낸 뒤 다시 화재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불은 마침내 꺼졌고, 화재진압에 지친 그는 마당에 주저앉아 한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옵저버신문사의 한 사진기자가 도베르만이 자신을 구해준 그 소방관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진기자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궁급해 하며 카메라를 들어 올려 만일을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도베르만은 자신과 자신의 뱃속에 새끼를 구해준 뒤 지쳐 있는 소방관에게 다가가 시꺼멓게 그을린 그의 얼굴을 핥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방관 제프 역시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도베르만에서 자신의 얼굴을 맡긴 채 답례를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세요? 때로는 우리의 삶이 불길 속에 갇혀 있는 도베르만 같다는 사실 말입니다. 내 몸에 입은 상처 때문에, 내 뱃속에 있는 새끼 때문에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의 불길이 다가오는데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평소에는 두려울 것 없이 살 때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떵떵거리기도 했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오고 맙니다. 죽음의 불길이 자신을 향해야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도베르만에게 나타난 소방관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십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평안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그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죄로 알지도 못한 채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멋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되돌아보면 정말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운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는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천국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갔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온 맘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까? 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온 맘을 다해야 합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요로운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자에게 찢긴 먹잇감처럼 찢기고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삶이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 사망의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풍요로움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좋은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의 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당하게 하나님을 믿고 적당하게 하나님을 사랑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적당하게 세상의 것을 즐기고, 적당하게 믿는 사람의 모습을 지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적당하게 하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군대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날은 저녁 식사 반찬으로 돈가스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돈가스가 나오는 날이라 병사들이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병사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당 돈가스를 두 개씩 준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돈가스를 두 개씩이나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식판을 내민 병사들은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돈가스는 두 개를 받았는데, 돈가스 소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식 담당 병사가 돈가스 한 상자와 소스 한 상자를 수령해 와야 하는데, 실수로 돈가스 상자만 두 개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 불평의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어떻게 소스도 없이 돈가스만 2개를 먹으란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때 한 선임병이 불평하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들 불평 그만하자. 분명히 어떤 부대에서는 지금 돈가스 없이 소스만 2인분씩 먹고 있을 거야.”

 

그렇지요? 여기에 돈가스만 두 박스를 가져왔으니 어느 부대에선가는 소스만 두 박스를 가져갔을 것이고, 그 부대에서는 돈가스 대신에 소스만 먹고 있을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을 조금 달리 하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신 복을 감사해야 합니다. 못난 우리들임에도 이렇게나마 긍휼히 여기시고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조금 힘들어도 감사하십시다. 불평한다고 상황이 바뀌어지는 것 아니라면, 불평보다 감사를 선택하십시다. 그러면 이틀 후나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체험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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