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장 1~14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상의 소식
이준원 목사 2019.3.6.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히브리서에 대하여
어느 학교 영어 시간에 늘 장난만 치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수업 시간에 항상 장난을 치는데, 그럼 네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한 번 보자. good의 비교급과 최상급이 뭔지 아니?” “아, 쉬운 질문이군요. good-better-best이지요.” “흠, 제법이구나. 그럼 good의 반대말인 bad의 비교급과 최상급은 뭐지?” “그것도 너무 쉽죠. 저를 너무 우습게 아시는군요. 당연히 bad-badder-baddest죠.”
이것은 우스갯소리이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히브리서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영어 good의 비교급인 ‘better’(더 좋은) 또는 ‘superior’(뛰어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much superior, 1:4)
“더 좋은 소망”(a better hope, 7:19)
“더 좋은 언약”(a better covenant, 7:22)
“더 아름다운 직분”(superior ministry, 8:6)
“더 좋은 약속”(better promises, 8:6)
“더 좋은 언약”(better covenant, 8:6)
“더 좋은 제물”(better sacrifices, 9:23)
“더 낫고 영구한 소유”(better and lasting possessions, 10:34)
“더 나은 본향”(a better country, 11:16)
“더 좋은 부활”(a better resurrection, 11:35)
“더 좋은 것”(something better, 11:40)
이 말들은 모두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구약 레위기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별명이 ‘신약의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는 율법, 특히 제사법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누가 썼는지가 확실하지 않은 책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한데, 그래서 바울이 쓰지 않았는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자기 편지에 “나 바울이”라고 쓰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헬라어 원어의 문체도 바울의 편지들과는 다릅니다. 바나바가 썼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학식이 뛰어났던 아볼로가 썼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장사 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저자가 아닌가 하고 추정해보지만, 누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AD 70년에 일어났는데,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AD 70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살아 있을 동안(13:23) 쓰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고, 박해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오랜 유대교 체제가 막 붕괴되려고 하는(12:26-27) 내용도 나오는데, 그러한 정황 등을 볼 때 AD 64~68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내용이 어려워서, 어떻게 보면 로마서보다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을 비교하며, 예수님께서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 아니 최상의 구주이신가를 증언하는 것이 그 기록의 목적입니다. 원래 헬라어 표제는 “히브리인들에게”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라고 이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인의 관습이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선포하고자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히브리서 기자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증언한 복음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2. 히브리인들에게 전해진 복음
1) 예수는 어떤 선지자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구약에서 기장 존경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바로 선지자(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런 특권을 남용해서 듣지도 않은 거짓 음성을 들려주고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거짓 선지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남북 왕국으로 분열된 후 뒤로 갈수록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은 거짓 선지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했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나라에서 나오는 월급을 받아 먹고살며 예언을 하니까 늘 왕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했습니다. ‘왕은 잘되실 겁니다’, ‘만세수를 하옵소서!’ 같은 말만 했습니다. 아합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줘서 아합이 전쟁에 나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때도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을 전했는데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잡혀서 고문도 당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선지자, 하나님이 직접 기름 부어 보내주실 참된 선지자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그분이 마침내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2절)
구약의 가장 첫 번째 예언자이자 위대한 선지자는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그 모세조차도 그분(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종에 불과했다고 알려줍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장차 말씀하시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온 집안 사람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안 사람을 성실하게 돌보셨습니다. 우리가 그 소망에 대하여 확신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 사람입니다.” (3:5-6, 새)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언 사역을 완성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가 바로 진리이시며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되신 분입니다. 그가 바로 복음 그 자체이십니다.
2) 예수는 천사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구약시대부터 시작하여 중세에 이르도록, 믿음이 깊은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천사와의 교감이었습니다. 시인들은 천사에 대한 시를 썼고, 미술가들은 기도하며 천사를 그렸으며, 음악가들은 천사를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천사 숭배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소위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그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4-5절)
또한 계속해서 그 뒤도 보십시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6-7절)
6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오실 때 천사들이 그를 경배했다고 선포합니다. 7절은 예수는 천사들을 당신의 사역자와 심부름꾼으로 부리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8절)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천사를 동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발 천사를 봤으면 좋겠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오히려 천사를 부리며 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14절)
지난주에 미북 회담이 베트남에서 열렸는데 별 성과 없이 끝나서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까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나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게나,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들이 철통같은 경호를 펼치는 장면들이 나왔습니다. 가끔 유명한 연예인, 정치인, 예술가 등이 지나갈 때 경호원들이 따라붙어 철저히 보호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부러우셨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예수 믿는 사람의 놀라운 특권을 보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경호원 정도가 아니라 천사들이 섬겨준다는 것입니다. 평생 천사들이 따라다니며 우리를 섬긴다는 것인데,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천사의 임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수종을 들던 것처럼, 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귀한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우리를 섬겨줍니다. 우리는 천사가 따라다니며 호위하고 지켜주는 굉장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도 볼 때마다 존귀하게 여겨주어야 합니다.
3) 예수는 모든 제사장보다 뛰어난 큰 대제사장이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 의하면 예수가 누구십니까? 앞서 이야기한 그 무엇보다 더 좋으신 better로 증언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선지자보다 뛰어나시고 천사보다 뛰어나시며, 더 좋은 소망과 더 좋은 약속을 해주시는 분, 그분 자신이 더 좋은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더 나은 본향, 더 낫고 영구한 소유를 보증하시고, 더 좋은 부활의 보증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better(더 좋은) 정도로 머물 수 없으십니다. 그분은 the best(최고)이십니다. 히브리서에는 best 대신 great, 즉 ‘위대한’ 혹은 ‘큰’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시는 분입니다.
“큰 구원”(great salvation, 2:3)을 약속하신 분
“큰 대제사장”(a great high priest, 4:14)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high priest of the good things, 9:11)
“허다한 증인들”(a great cloud of witnesses, 12:1)과 함께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
“양들의 큰 목자”(that great Shepherd of the sheep, 13:20)
이렇게 여러 차례 위대한 분으로 선포되어 있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그분의 역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구약의 제사장과 비교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0:11-12, 새)
구약의 제사는 일시적인 속죄의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영원한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절)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이 위엄의 보좌에서 우리를 돕고 계신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14-16)
이 큰 대제사장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이야말로 1세기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전해주는 복음이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주는 복음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사셨기 때문에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때 우리가 괴롭고 어떤 때 즐거운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를 잘 이해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3. 그 무엇보다 위에 계신 예수
여러분, 그 무엇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십니까? 예수님이 무엇보다 더 좋으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배우자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십니까? 자녀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십니까? 부모님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십니까? 좋아하는 어떤 취미보다도 예수님이 더 좋으십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 14:26-27, 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참된 제자로 살아가지는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가족들을 다 미워하고 자기 목숨도 하찮게 여겨야 제자가 된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가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주체가 누구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나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너 자신의 욕심이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를 빠지고 다른 데로 간다면 그렇게 만드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결정하라고 하셨느냐는 겁니다. 수요예배에 오는 대신 다른 일을 한다면,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VIP가 딱 이 시간 밖에 만날 수 없다면 당연히 그리로 가야 합니다. 물론 매번 그런 게 아니라 어쩌다 한 번이니까 그렇습니다.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겹칠 때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올 수 있는데 안 온다면, 그 결정을 누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라, 용서하라, 용납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새 계명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계속 미워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이 누구의 결정이냐는 것입니다. 뭔가를 하기로 결정할 때 또는 뭔가를 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 그것이 누구의 결정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역을 맡아 봉사하다가 그만둘 때, 그것도 누가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의 답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라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또는 내가 원하지 않아서 또는 다른 것을 원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아니라는 표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어떤 일을 내가 쥐고 내 뜻대로 하려고 한다면, 주님은 하라고 하시는데 안 하겠다고 하거나 주님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나는 하겠다고 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주님의 제자가 아닌 겁니다.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hate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결정을 따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내 뜻대로 하면 편하고 좋은데, 주님 뜻대로 하면 부담스럽고 자유가 없고 귀찮은데 억지로 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 뜻대로 한다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하면 굉장히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오히려 주님 뜻대로 안 하고 내 맘대로 하면 더 무거워집니다.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은 너무 기쁘고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새)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뭔가 멍에를 메고 짐을 진 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멍에와 주님의 짐이 아니라면, 뭔가 다른 멍에를 메고 다른 짐을 지고 살게 되는데, 주님의 짐은 편하고 가볍지만 다른 짐은 다 불편하고 무겁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주님을 최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은 마음에 쉼을 얻고 평안과 기쁨으로 살아가지만, 주님 뜻을 알면서도 자기 뜻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가 해보겠다. 내 맘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평생 수고해야 합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그리고 염려가 평생 끊이지 않습니다. 참 안타까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걱정만 하고 불편한과 무거움 속에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자유를 구속받고 옴짝달싹 못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너무 행복하고 너무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그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그 무엇보다 예수님이 더 좋다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이 더 좋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돌봐주시며 우리 가족들도 다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나를 돌보기 위해 애쓰는 것이 더 안전합니까, 아니면 온 우주의 주인이신 능력의 주님께서 나를 돌보아주시는 것이 더 안전합니까? 또 내가 내 자녀를 돌보려고 애쓰는 것이 더 성공적이겠습니까,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능력의 주님께서 돌보아주시는 것이 더 성공적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 자신과 자녀를 돌보기 위해, 내 일을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 온갖 애를 다 쓰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더 좋은 이유는,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돌보아주시며 책임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원한 사랑이 되어 주셔서 죽음 이후에도 우리와 영원히 동행해주십니다.
2013년 4월 16일 미국의 존경받던 복음성가 가수 겸 작곡가였던 조지 베벌리 쉐이(George Beverly Shea, 1909-2013)라는 분이 10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원래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이었던 그는, 23세 되던 해에 뉴욕시티(New York City) 음악 오디션에서 합격하여 라디오 전속가수로 채용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크리스천 찬양을 부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방송국에서는 합의된 노래만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고민하다가 어머니와 의논했고, 그의 어머니는 기도하며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보자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조지가 자신의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피아노 건반 위에 낯선 시 한 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읽기를 원해서 가져다 놓은 리아 밀러(Rhea F. Miller) 부인의 시였습니다. 그 시를 읽는 순간 조지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을 따라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불멸의 찬송가가 태어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 pierced hand.
Than to be a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이 가사를 제가 나름대로 직역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은이나 금보다 예수님을 더 갖고 싶습니다.
나는 셀 수 없는 재물을 갖기보다 그분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집이나 땅보다 예수님을 더 갖고 싶고,
나는 못 박히신 그분의 손에 의해 이끌림 받기를 더 원합니다.
넓은 영역의 왕이 되기보다
아니면 죄의 두려움 안에 붙들리기보다
이 세상이 오늘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나는 예수님을 더 갖고 싶습니다.
결국 조지는 그 방송국 계약을 거절하기로 결심하고 그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이 새 노래를 처음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후 그는 찬송을 마음껏 부를 수 있다는 조건으로 시카고 방송국과 전속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송국에서 자기보다 열 살 아래인 젊은 전도자를 만나 전도집회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전도자의 이름은 바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입니다.
그 후 조지는 빌리 그레이엄과 전 세계를 다니며 인류 역사상 기장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10차례에 걸쳐 그래미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 2011년 그래미상 수상식에서 102살의 나이로 Lifetime Achievement Award(평생공로상)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모든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오른 그의 수상 소감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박수보다도 나는 예수가 더 좋습니다(I‘d rather have Jesus than your applause).” 이 말은 사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곡의 2절 가사 첫 부분을 살짝 바꾼 것입니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men’s applause.”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분,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인들에게 전한 복음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주는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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