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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8장 6-13절(그리스도의 놀라운 새 언약)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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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8장 6-13

그리스도의 놀라운 새 언약

이삼규 목사 20160529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히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 8: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 8: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히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새 언약(카이노스 디아데케)을 세우셨지만 새 언약의 목적이 옛 언약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은 어떤 의미에서도 옛 언약을 허물어뜨리지 않습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의 기초를 놓기 위한 잠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기 위해서 임시로 설치하는 비계(飛階)가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동안에는 비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건물이 완성되고 나면 이것은 철거됩니다. 구약의 언약, 즉 구약의 법은 비계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기에 사라지게 됩니다.

 

불완전한 옛 언약

 

옛 언약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일시적인 것이었고, 효과 면에서 말하자면 불충분했습니다. 왜 구약의 법이 완전에 이르지 못합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법’이라는 말은 단지 십계명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계명만 주시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은 더 큰 법의 일부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더 큰 법에는 제사, 제사장 제도, 제단과 피 그리고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에 이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었지만 내면적인 것이 아닌 외형적인 것에 대한 규정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성품은 언제나 그의 내면에서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겉’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막 7:20)의 뿌리가 되는 것, 즉 ‘속’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법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태국에 가보니까 호랑이를 줄로 묶어 놓고 그 앞에서 그림을 그려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줄에 묶여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호랑이입니다. 미치광이 살인자를 평생 감옥에 가두어둔다고 해도 그의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미치광이 살인자일 뿐입니다. 이것이 구약 법의 약점입니다. 구약의 법이 사람 속에 있는 동기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약의 법들은 외형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명령입니다. 총 613개의 법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라’는 법 248개이고 나머지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법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라는 법보다 하지 말라는 법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속에 있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법으로 인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낙양리 가게 앞에 신호등이 있습니다. 많은 운전자들이 신호를 지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신호와 아무 상관없이 싱싱 달리는 운전자들이 있습니다. 도로 교통법이 그를 바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이 법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법을 지키고 감옥에 가는 것을 면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듯이 행동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미소를 보내고 상냥한 태도를 보인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강남역 지하 화장실에서 묻지 마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정말 무섭게 생겼을까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겉모습을 보고 ‘그가 죄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국회나 정부에서 이웃 사랑을 의무화하는 어리석은 법을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법은 사람의 내면적, 도덕적 성향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법의 약점, 즉 연약함입니다.

 

우리 마음에 기록된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내면적, 도덕적 성향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새 언약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히 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맺을 새 언약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돌판에 쓴 것이 아닌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새 언약을 받으려면 옛 언약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인을 지배하는 도덕적 능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외부로부터 작용하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방울뱀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방울뱀의 행동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똬리를 틀고 상대를 공격할 줄 압니다. 그것이 학교에 가서 배운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타고난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적의 접근에 대항해 나오는 이런 행동은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닙니다.

 

병아리를 보십시오. 힘들게 알을 깨고 나옵니다. 알을 막 깨고 나온 병아리는 5분 정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누워있지만 미풍이 불어 털을 말려주고 솜털이 보이기 시작하면 온 힘을 다해 일어납니다. 그리고 잠시 후면 걸어 다니며 밖에 나가 흙을 긁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사전 경험이 없음에도 그렇게 하도록 이끄는 ‘선천적 요인’ 때문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타고난 성향은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을 ‘미지의 요인’이라 부릅니다. 물론 이런 생물의 행동이 외부적 요인 때문에 표면적으로 바뀔 수는 있습니다.

 

부안에 가면 원숭이 학교가 있습니다. 원숭이들을 훈련시켜 여러 가지 동작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원숭이로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숭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볼 때,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가능합니다. 죄인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를 해주고 정기적으로 성찬식에 참여시키고 윤리를 가르치면 얼마 후부터 그도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원숭이가 훈련을 통해서 학생처럼 행동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와 진정한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내적 요인’이 그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교육이라는 것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명목상 그리스도인’ 또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이끄는 ‘선천적 요인’ 또는 ‘미지의 요인’이 없습니다.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하늘에는 거룩한 천사장이 있습니다. 천사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용이라고도 불리는 사탄(루시퍼) 즉 마귀가 있습니다. 두 존재만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장은 왜 천사장처럼 행동할까요? 그것은 그의 안에 있는 ‘미지의 요인’이 그로 하여금 그답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미지의 요인’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것이 그의 안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천사장답게 행동하는 것은 훈련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그 무엇’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병아리가 흙을 긁고 싶은 충동에 저항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사장은 자신을 다른 존재와 비교하면서 “이제 나는 천사장답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천사장답게 행동하는 것은 천사장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둘 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계속 이 악순환을 반복하며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장과 완전히 대조되는 존재는 마귀입니다. 마귀도 그답게 행동합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할 때도 살인할 때도 그답게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의롭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미지의 요인’이 신자들의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 종교들 중 하나에 불과한 기독교’와 ‘참된 기독교’ 사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을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과 ‘사람을 내면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 그림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가수 조영남씨가 있습니다. 그는 노래를 너무 잘 불러서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 인정받고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를 미국에서 신학 공부하도록 하였고 목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가 그린 작품 가운데는 자신은 부처가 되고 싶다는 글과 함께 부처상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은 그림도 있습니다. 그가 성악을 전공하고 가수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찬양도 연습하면 잘 부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종교적 훈련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종교적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심어주신 ‘그 무엇’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신생(新生), 중생(重生), 회심(悔心)’같은 이름말입니다. 우리가 회심하는 것은 거듭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미지(未知)의 요인(要因)’을 가리켜 ‘내 법’이라고 부르십니다.

 

히 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의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심적인 동기로 작용합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약의 교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도 서로 충돌하는 요인들이 존재합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하나님의 법이 삶의 버팀목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저런 모양의 저항세력(육신의 연약함, 세상, 정욕이나 옛 습관)이 때로는 그를 이깁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탄식합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곧이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선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길들여지지 않은 요인들(육신, 음란, 옛사람 등)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종교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새 언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히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종교를 가르칠 수 있는가?” 오늘날에는 소위 ‘종교교육’이라는 것이 굉장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나는 종교교육이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교육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교리와 윤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것은 교리입니다. 교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물론 윤리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윤리는 의로운 법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가르칠 수 있고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들입니다. 교리와 윤리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들은 교리를 믿을 때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를 듣고 배워 교리 시험에 합격하고, 요리문답을 글자 하나까지 정확하게 다 외운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통해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마음을 심어줄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나 종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교과과정이 만들어진 적은 없습니다. 아기는 생명이기 때문에 태어나야 합니다. 물론 아기가 태어나 성장한 다음에는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려면 우선 그가 태어나는 일이 먼저입니다. 교육이 생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종교교육을 통해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고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합니다. 기독교가 금하는 것들을 삼가고, 헌금도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구원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미지의 요인’을 영혼 안에 심어줍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따라 성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에게 누군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하나님의 법이 여러분의 심비에 새겨졌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드리십시오. “주님, 원숭이는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원숭이로 죽습니다. 제가 그런 원숭이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제가 죄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선한 죄인, 도덕적 죄인,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진 죄인, 종교적 죄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죄인임을 깨닫고 성도로 바뀌는 자가 되게 하소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진정 우리의 내면 깊은 속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람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어와 근본적 변화를 일으켜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심비에 새겨져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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