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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9장 15-28절(새 언약의 중보자)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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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9장 15-28

새 언약의 중보자

이삼규 목사 20160417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히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히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 9: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진

 

리를 가리키는 러시아 말은 프라우다(prauda)인데 ‘약속’ 이란 뜻을 함께 갖고 있다합니다. 톨스토이가 어느 시골을 여행할 때의 일이라 합니다. 그는 예쁜 백합꽃이 새겨진 가방을 갖고 있었는데 한 소녀가 엄마에게 톨스토이가 든 가방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톨스토이는 열흘 뒤에 돌아올 텐데 그때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열흘 뒤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백혈병으로 죽은 뒤였다 합니다. 톨스토이는 “아이는 갔지만 약속은 살아있다”며 소녀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무 십자가 묘비위에 가방을 걸어 놓았다합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누군가가 나무대신 돌 십자가에 돌로 조각한 가방을 놓고서 ‘프라우다’ 라는 비명을 새겼다합니다. 그 뒤 이곳은 ‘프라우다’라는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언제나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유서(遺書)(디아데케/covenant)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서에 당신의 이름을 써 넣으셨습니다. 그러나 유서가 작성된 지 2천 년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그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히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의 효력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서가 효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줄곧 효력을 발휘해오고 있는 이 유서(遺書)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성실하심 때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유업을 약속합니다. 새로운 이 유서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는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유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훌륭한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조금 떨어져서 보아야 합니다. 그림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세부적인 것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전체적인 구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는 멀리서 숲 전체를 보고 나중에는 안으로 들어가 나무 하나 하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피와 생명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피와 생명 사이의 신비로운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와 속죄에 대한 이 교훈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자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의 핵심이었습니다. 피는 신비롭고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죄와 죽음 사이의 연관성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간은 죽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영혼의 멸절(滅絶)과 모든 존재의 종말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 집단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증인과 같은 이단은 여호와 증인 즉 144,000명 안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은 멸절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을 부정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멸절(滅絶)’은 존재하는 것이 없어져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무(無)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창조의 과정을 거꾸로 돌려서 무엇인가를 무(無)로 만드신 경우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연에서도 멸절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은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화장을 합니다. 그러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재로 변한 시신을 유골함에 보관하여 납골당에 봉안하거나 아니면 자연장 또는 수목장을 합니다. 서남권추모공원에 가보면 자연장과 수목장 그리고 납골당 세 가지 방법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자연장이나 수목장은 유골을 나무나 한지로 된 유골함에 넣어 땅에 매장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연장 기간이 40년입니다. 그러면 40년이 지난 후에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아무 것도 남지 않고 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시신이 재가 되고 재가 변하여 흙이 되었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가 일어난 것 뿐이지 물질은 멸절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죽음을 통해서 오직 거처를 바꿀 뿐이다

 

우리 각 사람 안에 살아 있는 영혼은 멸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 거처가 바뀔 뿐입니다. 거처를 바꾸지만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만들어진 인간 영혼의 가치와 무한한 본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어머니가 사랑스런 아기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아기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주위의 소리에 즉각 반응하고 혈색이 좋고 생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비극이 찾아옵니다. 유행병이 아기를 쓰러뜨립니다. 숨을 거둔 아기를 안은 어머니는 커다란 슬픔에 잠깁니다. 지난 2년 전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도 자식을 바다에서 건지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죽음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기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아기의 장례식 때 간단한 예배가 드려집니다. 조그만 관 속에 생명이 없는 아기가 마치 움직이지 않는 하얀 천사처럼 누워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장례식 때 관 속에 누워있는 고인의 얼굴을 보게 합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이가 멸절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의 존재 형태가 조금 변한 것뿐입니다. 물론 그 변화는 부모에게는 가슴 아픈 일인 것입니다. 아기 안의 영혼, 그 아기의 지능, 생각, 아이가 내던 귀여운 웃음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생명이 없는 아기의 몸은 땅에 조용히 누어 있다가 언젠가는 흙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아기의 영혼은 결코 멸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기의 영혼이 존재의 장소를 바꾸었지만 결코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 가지 죽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결국 죽는다는 성경의 교훈을 믿습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육체적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입니다. 인간이 영적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인류의 첫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경고를 무시하고 금지된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들의 고집대로 그분의 법을 어긴 그날,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탄이 교만과 불순종에 빠져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그는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사14:13)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늘에서 땅으로 쫓아내셨습니다. 그 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우리 주변에 있어 왔습니다. 그는 멸절되지 않았고, 장차 받을 영원한 심판이 그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죽음은 멸절, 즉 존재의 사라짐이 아닙니다. 죽음은 달라진 존재의 형식 안에서 생기는 달라진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영적 죽음을 모른 체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죽음에 대해 한 문장으로 정곡을 찔러 말했습니다.

 

딤전 5: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육체적으로는 죽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죽음이 죄의 무서운 결과들 중 하나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와 더불어 죽음도 세상에 들어 왔습니다. 죄를 범하는 영혼은 죽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죄는 죽음으로만 끝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또 다른 사실은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주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으로써 죄를 끝내십니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죄는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순간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끝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분은 죽음으로 하여금 죄를 끝내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주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를 끝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게 만드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나타난 분명한 교훈에 따르면, 죄에 물든 삶은 권리를 몰수당한 삶입니다. 죄를 범한 영혼은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몰수당한 삶을 구하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구주의 보혈이 우리를 위한 제물로 드려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의 속죄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와 생명 사이에는 신비로운 생명적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아들이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려졌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 된 행위들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영적 진리는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진리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속량을 위해 치러진 대가에 대해 너무 가볍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속량하신 놀라운 일이 가축 시장에서 소나 말을 사는 일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가축을 거래하는 것보다 더 높고 더 거룩하고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다운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물로 바친 것이 의식적 상징적 차원에서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그리고 영원히 유효합니다. 여기에서 “유효하다”는 말은 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효과가 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말은 우리가 즐겨 사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피와 생명은 하나입니다. 피가 흘려졌을 때,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는 분으로서 많은 죄인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죄에 빠진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길보다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누군가 이 근본 진리를 바꾸거나 부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이 근본 진리를 변형시켜서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와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진리가 우뚝 서 그 아름다움과 유효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충족되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충족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믿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효한 대속적 죽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공로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믿었을 때 우리는 죽음의 능력이 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가운데 맺어진 새 언약의 중보자, 즉 새 언약의 집행자가 되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중보자’라는 말은 ‘메시테스’라고 하는데 ‘중보, 중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중보자는 화해가 필요한 두 편 사이에 서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죄악에 빠진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죄 때문에 그분과 인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멀리 떨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무엇으로 다리를 놓아 주셨습니까?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서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유서가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맺으신 언약과 그분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그분과 화목 되었습니다. 그분의 은혜로운 새 유서, 즉 그분의 언약은 죄 사함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동안에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새 언약과 유서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것은 즉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유언을 남긴 분의 죽음은 죄 사함, 깨끗하게 함, 교제, 그리고 영생의 약속을 즉시 가능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얻게 된 유업은 그토록 은혜롭고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유언의 효력이 발생하게 한 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자신의 유언을 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이 유산을 처분하거나 관리합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집행하는 영원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분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유서의 수혜자들에게 유서의 내용대로 집행해주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유서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서 집행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분 자신이 직접 집행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전에 그분은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제 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3일 만에 일어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 ‘살아계신 분’을 계속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믿음에서 떼어 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유주의 신학의 논리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소망을 갖고 있으며, 이 소망은 내세에서도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새 유서에 그 이름을 올릴 자는 누구일까요? 그리스도의 대답과 초대에서 그 답이 발견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나 거기에 이름이 오를 수 있습니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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